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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치명 Apr 04. 2021

성스럽지 못한

우울증2

 5년 동안 만났던 사람에게 너무나 큰 배신감을 느꼈다. 서로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는 밥을 먹으려다가도 울면서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알코올 쓰레기이지만 술을 마셔야만 잠이 들었다. 새벽마다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몸무게가 매일 줄었다. 그 개새끼때문에.


 나는 억울했다.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죽는 것이 최대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자꾸 자살을 상상했다. 고양이는 케이지에 넣어서 밖에 두어야지, 사람이 죽어 있습니다, 119에 신고해주세요, 모두에게 미안해요, 라고 적은 종이를 문에 붙여 두면 될 거야. 나는 밤마다 울었고 내가 끔찍하게 싫었다.


 집에 있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무턱대고 어디든 걸었다. 청계산에 올라가서 벤치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우울이 나를 보란 듯이 덮쳤다. 죽자! 나는 울면서 유서를 썼다. 그리고 옷장에 끈을 걸고 목을 맸다. 나의 미래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고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누구지? 나는 일단 끈을 풀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빠였다. 평소에 통화를 자주 하지 않는 아빠. 나는 코맹맹이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밝은 척을 했다. 아빠, 왜? . 별일없냐?, 응, 건강 잘챙겨라. 나는 전화를 끊고 통곡했다.


 나는 다시 정신과를 찾았다. 그리고 의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동안 나를 혼내기만 했던 의사가 나에게 공감했다. "저도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네요." 갑자기 내 마음에 불이 켜진 것처럼 환해졌다. 평온했다. 나는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죽기는 왜 죽어, 벌은 그 새끼가 받아야지. 물론 수면제를 처방받을 만큼 상태가 안 좋기는 했지만 적어도 죽지말아야 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의사는 수면제를 처방해 주면서 겁을 줬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약인 줄 알아요? 기억이 사라져요. 집안에 있는 칼이나 자해할 수 있는 도구는 치우고 자요." 나는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울지 않았다.


 오래만에 B를 만났다. 그런데 우울증 환자는 우울증 환자가 알아 보는 법인가. B의 얼굴에 무기력과 우울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는 B에게 물었다. "괜찮아?" B가 대답했다. 방금 정신과에 다녀왔어, 익숙한 약들을 보여줬다.  나는 B를 평소처럼 대했다. 그리고 B의 이야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공감을 했다.


 예전에 친구 Y가 경찰서에 걸려 있는 자살 예방 플래카드를 보고 화를 낸 적이 있다. 한심해.죽을 용기로 살면 되지. 있잖아,  얘야, 살아 볼 용기를 내는 것은 죽을 용기를 내는 일보다 어마어마한 결심이 필요해. 혼자서는 너무 어려워. 그러니까 힘내라는 불가능한 격려 대신 많이 아팠구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공감해줘.  거 아닌 일 가지고 유난이라는 둥 개소리  할 거면 아예 입을 닫고 말이야.


 그리고 힘내, 라는 말도 가끔은 기계적인 위로같아. 차라리 괜찮을 거야, 등이라도 한번 토닥여줘.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의지가 되니까.


 나와 B는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면서 안부를 묻는다. 잘 버티고 있지? 괜찮아질 거니까 버텨 보자. 나는 나때문에, 너때문에 더 슬프기 싫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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