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프라하에는 예정보다 며칠 일찍 도착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프라하는 정말 가까웠지만 가는 길에 마땅히 정박할 곳도 그리고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우린 유명한 여행지를 가는 것보다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도란도란 지내는 것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빨리 시끄럽고 정신없는 도심에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가끔은 오히려 사람 많고 정신없는 곳에서 우리가 더 눈에 띄지 않아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작은 도시 체코 프라하가 그러할 것 같았다.
지은 지 60년은 더 됐을 법한 아파트들 사이로 난 길 위에는 촘촘하게 주차 구역이 표시되어 있었고 거주자 우선주차 구역과 일반 주차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반 주차 구역은 다시 무료와 유료로 나뉘어 있었는데 어딜 가나 그렇듯 무료 주차 구역은 이미 꽉 차 있거나 정박을 하기엔 주변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대로변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 다들 정신이 나가 있다지만 막 프라하에 도착해 도시의 분위기 파악 조차 안되었던 터라 유료 주차 구역에 돈 안 내고 정박을 할까 했던 마음을 접고 일단은 한적한 곳으로 차를 돌려 하루를 보냈다.
프라하의 첫 정박지는 저예산 느와르 영화에나 나올 법한 곳이었다. 기찻길 옆으로 오래되고 낡은 기차들이 쌓여 있는 기괴한 폐차장 같은 곳에는 기차 박물관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옆으로 난 막다른 골목이 우리의 정박지였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골목길의 가장 끝에 밴을 주차했다. 골목길의 초입에는 다른 차들도 띄엄띄엄 있었고 길가로 술병과 주사기가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골목길의 끝에는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갤러리가 있어서 조금 더 밝고 안전한 듯 보였다. 그래도 평소 같았으면 절대 정박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근처에 프라하 시내까지 가는 트램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번엔 사랑이를 차에 두고 혜아와 오붓하게 여행을 하고 싶었기에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스냅 촬영할 때 처음 사랑이를 차에 두고 외출한 뒤로 두 번 째였다. 혜아는 사랑이를 두고 둘이만 놀러 가는걸 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사랑이에게 끌려다니랴 주변 눈치 보랴 여행다운 여행을 못하는 걸 아쉬워했고 난 사랑이 때문에 혜아 손을 꼭 붙잡고 여유롭게 거닐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거 같아 괜히 사랑이가 미웠다. 애를 키운다면 꼭 이런 기분 이리라.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하나 둘 키우고 있는 동갑내기 동네 친구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치맥을 하자며 불러냈을 때 나올 수 없는 친구의 기분이 이해가 되었고 그런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지 짐작되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사랑이를 밴에 남겨두고 혜아와 난 정말 오붓이 여행을 온 다정한 커플처럼 프라하 시내로 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단 둘이 프라하에서 데이트라니 너무 기대가 됐다. 나름 외모에 신경을 쓴다고 오래되고 허름한 옷들 중에 가장 멋들어진 것을 골라 차려입기까지 했다. 오늘은 오빠가 쏜다며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얼마 들어있지도 않은 공동 통장의 체크카드를 흔들며 프라하 시내에 도착했지만 왠지 모르게 한산했다. 전날 잠깐 사랑이와 함께 나왔던 프라하 시내는 여행객들로 인산인해였는데 이 날은 여전히 여행객은 많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기엔 한적해 보였다.
우리나라는 크리스마스 연휴가 대목이다. 그래서 크리스마 이브부터 크리스마스 당일 날까지 거리는 식당과 술집들의 조명으로 불야성이고 골목골목은 술과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런데 유럽은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인데 식당과 술집에서 일하는 주인과 종업원들도 가족이 있으니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브엔 일찍 문을 닫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하나둘씩 불이 꺼져가는 프라하 시내에서 우린 겨우 문을 닫지 않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아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이탈리아 음식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했지만 그래도 둘이 만나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 같은 분위기의 레스토랑 한 켠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비록 피자와 파스타가 우리의 메뉴였으나 유럽 여느 가정집의 칠면조 요리가 부럽지 않았고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한상차림의 한국음식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명 여행지에만 오면 사건사고가 생기는 우리의 징크스 아닌 징크스 때문에 밥을 다 먹을 때 즈음 혜아는 알 수 없는 어지러움과 울렁증으로 어수선하게 끝이 났지만 첫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밴으로 돌아오니 사랑이는 쓰레기봉투부터 시작해서 입에 닿는 건 모두 물어뜯어놨고 심지어 조금 남은 초콜렛까지 먹어 치워 버린 뒤였다. 개는 초콜렛을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혜아는 기겁을 하고 난 사랑이의 몸무게에 비해서 먹은 초콜렛 양이 너무 작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고 혜아는 무슨 말을 그렇게 무심하게 하냐며 화를 내고 사랑이는 그 와중에 우리가 와서 좋다고 핥고... 그렇게 우리의 크리스마스이브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크리스마스는 훨씬 더 정신없이 지나갔다. 수많은 혜아의 지인들이 모였기에 나름 큰 에어비앤비 숙소는 터져나갈 거 같았고 다들 오랜만에 한국인들과의 술자리라 한껏 흥분했으며 크리스마스에도 여전히 상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다행히도 밴에 식재료가 남아 있어 잔뜩 쌓인 술들과 곁들일 안주도 넘쳐났다. 밴라이프의 현실을 잊고 마치 한국에서 친구들과 엠티를 온 것 마냥 먹고 마시고 끝없이 얘기하며 떠들다 보니 어느덧 조금은 허무하게 크리스마스가 끝나버렸다.
모두가 각자의 길로 헤어진 다음 날 밴으로 돌아온 우리는 느와르 영화 배경장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 뒤에 만나야 할 혜아의 지인이 또 있었고 한국에서 신혼여행을 온 신혼부부의 스냅 촬영도 있었기 때문에 프라하에 좀 더 있어야만 했다. 마침 에어비앤비 주인이 프라하 시내의 주차 구역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하길 거주자 우선 주차 구역과 파란 선으로 그어진 곳만 피해서 주차하면 괜찮다고 확신에 차 말을 해주어서 우린 시내 한복판 건물들 사이 주차장에 정박을 했다.
예상대로 연말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과 여행객들로 넘쳐나는 도심 한복판에 정박한 우리 캠퍼밴을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열리는 파티에 서둘러 가는 듯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들과 먹을 음식을 잔뜩 사들고 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았으며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연말 프라하 여행을 원 없이 즐기고 있는 듯 우리의 커다란 밴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프랑스 파리에서 빨래를 하기 위해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갈 때 느꼈던 괴리감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집에서 예쁜 옷을 입고 나와 친구와 가족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부럽게 느껴지면서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밴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우리가 처량하게 보였다.
우리가 돈이 많았다면 지금 이 밴 안에서 행복할까. 통장에는 수 천만 원이 쌓여있고 이자를 꼬박꼬박 꽂아주는 투자처가 있으며 월세가 따박따박 들어오는 집이 있었다면 이 밴라이프가 훨씬 행복했을까. 혜아와 내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던 주제였고 언제나 결론은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더 행복해!'였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일상'은 가끔 그렇게 잔인한 현실이 되어 감정을 휘저었다.
발레리나 친구는 에너지와 흥이 넘친다. 힘든 일이 있어도 항상 사람들에게 밝고 기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런 그녀와 같이 있으면 혜아도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난다. 그런 친구가 동유럽 특유의 알 수 없는 암울한 어두움이 내려앉은 저녁, 우리가 감정의 기복을 겪고 있을 무렵 밴이 세워져 있는 주차장으로 왔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정신없이 다 함께 노느라 혜아와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역시 밴 안은 다시 활기가 돌았고 주로 이야기는 발레리나 친구와 혜아가 했지만 어찌 되었든 넷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앉아 있어도 네 명의 체온으론 밴 안을 데우는 건 무리인 듯했다. 그래서 난 난방을 하기 위해 경유가 들어간 등유난로를 들고 밴 밖으로 나왔다. 차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눈에도 잘 띄지 않았고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지 않아서 눈치 보지 않고 연기를 풀풀 뿜어대며 난로에 불을 붙였다. 밴 바깥의 날씨는 훨씬 추워서 불이 붙고 연기가 잦아들자마자 난로를 들고 다시 밴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하지만 열심히 난로에 불을 붙인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발레리나 친구는 숙소로 잡아 둔 호스텔에 너무 늦게 들어갈 수 없으며 주차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혼자 가기 좀 그렇다고 해 우린 사랑이도 산책시킬 겸 호스텔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밴 내부를 정리하고 난로를 끈 뒤에 차에서 나가려는데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에서 출발하기 전, 앞으로 밴라이프를 하며 열심히 운동도 하자며 할인매장에서 큰 맘먹고 구입한 나이키 에어 운동화가 안보였다. 아까 난로에 불을 붙이러 나갈 때 신고 나갔으니 분명히 밴 안 어딘가에 있어야만 했다.
이 좁아터진 밴 안에 없는 걸 보면 분명 난 방금 전 불붙은 난로를 들고 후다닥 들어오면서 무의식 중에 문 앞에 벗어놓고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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