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겨울은 비수기라 대부분의 캠핑장이 문을 닫거나 열어도 14유로에서 20유로 사이로 가격이 저렴하지만 우리 통장에 여유가 없으니 캠핑장을 피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조금만 고생하면 공짜로 물을 채울 수 있었고 약간만 아끼면 해가 짧은 겨울에도 태양열 충전만으로 전기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내고 캠핑장에 들어갈 이유는 더욱더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단 한 번도 캠핑장을 간 적이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차에 물이 다 떨어지기도 했고 혜아는 암스테르담에 가보고 싶어 했기에 공짜로 정박할 수 있는 곳은 검색해봤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캠핑장에서 지내기로 했다. 와이파이가 있을 테니 인터넷 펑펑 쓰고 샤워실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도 실컷 하면 조금이나마 돈이 아깝지 않을 거라고 애써 정당화하며 밤 8시가 거의 다 된 시간에 암스테르담 시내 끝자락에 있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비수기라 리셉션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꽤나 넓어 보이는 캠핑장은 한산했지만 입구에는 영업시간 외에 도착했을 때 캠핑하는 방법이 친절하게 적혀 있어서 큰 어려움 없이 주차를 했다. 그리고 의외로 띄엄띄엄 고급 캠핑카들이 캠핑장 이곳저곳에 주차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묘한 안도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사실 여름엔 어딜 가나 캠핑카로 넘쳐났다. 자연 속이든 주차장이든 아니면 도심 속이든 우리가 찾아 둔 정박지를 가면 그곳엔 반드시 우리보다 먼저 캠핑카를 정박시킨 여행객들이 있었고 또 끊임없이 다른 캠핑카들이 오고 갔다. 그들과 인사를 나눔으로써 우리도 그대들과 같이 길 위에서 사는 순수한 여행객임을 알리고 나면 우린 그곳의 주민이 된 듯한 유대감이 생겨서 옆 집 캠핑카에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고 밤에 잠이 들 때에도 우린 서로를 지켜준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 밴의 배터리가 방전돼서 시동이 걸리지 않았을 때 바로 옆 캠핑카 주인은 자신의 대시보드까지 뜯어내며 배터리를 연결해주었고 우리도 가스가 떨어진 옆 차 사람을 위해 물을 끓여주면서 이웃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정박지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으레 한여름이니 당연히 여행객이 정박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을 해서인지 우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서 왔는지 물어본다거나 밴을 개조한 우리 차를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겨울은 달랐다. 어딜 가든 우리 밖에 없었다. 정박지가 도심 속이건 자연 속이건 그곳엔 우리만 덩그러니 있었다. 때문에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아도 배터리 점프를 받을 수도 없으니 차 상태를 신중하게 살펴야 했고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나 차들이 왔다 갔다 하지 않는지 꾸준히 살피면서 밤에는 빛이 차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신경 쓰면서 잠들어야만 했다.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들도 추운 한 겨울에 밴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불쌍한 눈빛과 의심스러운 눈빛을 섞어서 쳐다보는 듯했다. 하긴 우리의 행색은 삼 일 전에 씻어 꾀죄죄한 몰골에 허름하고 얇은 외투를 입고 녹슨 고물 밴을 탄 동양인들이니 그럴 만도 했을 법하다.
그래서 어딜 가나 주위를 살폈고 무얼 하든 행동을 한번 더 신경 썼으며 끊임없이 상대방을 경계하는 것이 우리의 겨울 밴라이프였다.
그러한 생활 해 오다 캠핑장에 들어가니 그렇게 안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입구는 밤이 되면 굳건히 닫혀 있고 주변에는 유럽 어딘가에서 온 캠핑카가 불을 밝히고 있으며 여행을 온 사람들만 주위를 걸어 다니고 있었으니 그 무엇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풀어지면서 안도감과 동질감을 느낀 것 같았다.
정신적인 부담이 줄어든 우리는 늦은 밤 캠핑장을 휘젓고 다니며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밴 안에 쌓여 있던 설거지도 시원하게 해치워버렸다. 고장난 난로 때문에 여전히 밴 안은 추웠지만 오랜만에 사람다운 모습으로 캠핑장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암스테르담 여행은 한 마디로 정신없으면서도 아쉬운 시간이었다. 사랑이를 끌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으며 사랑이 때문에 가고 싶은 곳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한가로이 암스테르담 운하 사이를 걸어 다니며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유럽에서 가장 집값이 비싸다는 그곳의 집들은 어떤 모습인지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냄새에 흥분을 한 사랑이 때문에 혼내고 타이르느라 내가 무얼 보면서 지나왔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안네 프랑크의 생가도 당연하겠지만 개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밖에 멀뚱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다음에 꼭 배낭 메고 다시 오자고 다짐을 하며 밴으로 돌아와 이틀 째 밤을 보낸 다음 날 밴에 물을 가득 싣고 화장실과 오수통을 깨끗하게 비운 뒤 암스테르담을 떠났다. 며칠 뒤에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스냅 촬영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 밴은 당시에 나온 화물밴들 중에서 작지 않은 크기였다. 중간 정도의 길이에 높이도 높아서 크고 많은 화물을 넣기에 손색이 없었다. 밴의 구조가 다른 화물 밴들에 비해 조금은 어중간하긴 했지만 충분히 우리에겐 여유로웠다.
이런 우리의 밴은 한없이 넓어 보일 때도 있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좁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한여름에는 어딜 가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으니 공간은 훨씬 더 넓게 느껴졌지만 한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문을 열어둘 수가 없는 데다가 두꺼운 옷까지 껴입고 있으니 더욱 좁아 보였다. 하지만 사실 날씨보다는 어느 곳에 정박했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공간감의 차이는 훨씬 더 컸다.
자연 속에서 우리의 공간은 무한대였다. 문을 열면 그곳이 우리의 앞마당이었고 반대쪽 창문을 열면 바로 우리의 뒷동산이었기 때문이다. 머무는 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창문과 커튼을 활짝 활짝 열고 있었으니 밴은 한없이 넓게 보였다.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새로 이사 갈 방 네 개짜리 아파트 안내 책자를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보면서 난 가장 창문이 큰 방을 골랐다. 회사에 입사를 했을 때에도 23살짜리 신입사원 주제에 창가 자리에 앉겠노라고 고집을 피웠고 스타트업을 시작하며 사무실을 고를 때에도 창문이 없는 곳은 아예 선택에서 배제할 정도로 나에게 창문은 중요했다. 밖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면 아무리 넓은 곳이어도 좁은 곳에 갇힌 듯 갑갑했고 왠지 모르게 숨이 차오르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밴을 개조할 때 가장 우선순위는 큰 창문을 만드는 것이었다. 최대한 밴 안으로 빛이 많이 들어오길 원했고 밖이 훤히 잘 보이길 원했다.
그런데 도심 주차장에 주차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정박을 하면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혹시 모를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 차 문을 열기는커녕 창문 커튼조차 올릴 수 없다. 큰 소리도 낼 수 없으니 이럴 때 밴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사실 사랑이가 없던 때엔 그럭저럭 할만했다. 차 밖으로 하루 종일 나가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니 우리 둘이 꽁냥꽁냥 지낼 수 있었지만 사랑이를 입양한 뒤로는 산책을 시키거나 배변을 위해서 반드시 나가야만 했으니 더욱 신경이 쓰이고 눈치가 보여서 밴은 더욱 감옥처럼 작아 보였다.
벨기에가 그랬다. 수도 브뤼셀 만 그런게 아니라 벨기에 나라 전체가 그랬다. 단 한 군데도 마음 놓고 정박할 곳이 없었다. 외진 숲 속도 해가 지기 전까지 개를 산책 시키거나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도심의 주차장은 차들로 초만원이었다.
우린 벨기에 외곽의 외진 공원 공터에 밤 12시가 다 되어서 겨우 정박을 하고 하룻밤을 보냈지만 다음 날 아침 우리 밴만 있던 공터는 여지없이 자동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정면 주차를 해야 하는 곳에 길게 주차를 해놓은 상태였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커튼과 창문 블라인드를 모두 닫아 놓고 앉아 있자니 절로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화창한 햇살을 즐기며 산책을 하고 큰소리로 떠들며 얘기도 하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죄수 마냥 갇혀 있어야 하는 건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우리가 있으면 안 되는 날 있으면 안 되는 장소에 있으면 안 되는 차 안에 앉아 있으니 그런 거라며 자책까지 했다.
하지만 우린 캠퍼밴에서 살고 있고 언제든지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고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곳에서 지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린 커튼과 블라인드를 모두 열어 젖히고 프랑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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