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브뤼셀에서 스냅 촬영을 마치고 덩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우린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왔었던 실제 전투 지역 몇 군데를 더 들렀다. '포이 전투'가 있었던, 지금도 그 당시에 파 둔 참호들이 남아 있는 부아자끄 숲도 갔고 간호장교 르네가 있었던 교회 야전 병원도 갔으며 미군 셔먼 탱크가 남아 있는 곳도 갔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드라마를 좋아했기에 그 장소들이 우리에겐 특별했지만 사실 별거 없는 곳이다.
덩케르크도 그랬다.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영화를 좋아했던 우리였기에 마을 구석구석과 실제 영국군의 탈출이 있었던 해변이 특별해 보였고 신나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던 것이지 실상은 그저 겨울 비수기의 조용한 해변 마을일 뿐이었다.
유럽에서의 겨울 밴라이프는 언제나 그렇다. 어딜 가든 황량하고 썰렁하다. 유명한 관광지는 공사 중이며 해변은 스산하고 해도 오후 3시가 넘으면 져버린다. 사람들이 활기차게 걸어 다니고 여행객들이 북적거리면 우리도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더 신이 날 텐데 어딜 가나 길은 텅텅 비어 있고 간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무채색의 외투를 부여잡은 채 휑하니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이니 우리도 힘이 빠지고 의지가 사라졌다.
여름에 왔다면 더없이 좋았을 것 같은 덩케르크에서 이틀을 머물고 난 뒤 우리와 가장 인연이 깊은 파리로 밴을 몰았다. 차라리 사시사철 북적거리고 활기찬 곳으로 가는 게 우리의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밴을 타고 맨 처음 파리에 들어갔던 여름, 2개월 가까이 지내는 동안 차가 고장 나고 돈이 다 떨어지고 썰렁한 마트 주차장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지만 행복했다. 힘들지만 즐거웠고 스트레스였지만 활기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엔 밴라이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에너지가 넘쳤던 이유도 있겠지만 도시의 분위기도 큰 영향을 미쳤던 듯했다.
여름의 도시는 바쁘고 활기찬 사람들로 가득했고 신이 난 여행객들의 밝은 에너지로 거리가 넘쳐났다. 그런 도시 한복판에 정박을 하고 지냈으니 힘이 빠지거나 의지가 사라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통장에서 잔액이 줄어들어도 절망적이지 않았고 차를 고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도 막막하지 않았다.
점점 더 춥고 어두워져 가는 2019년 1월, 우리에겐 그런 파리의 기운이 필요했다. 프라하에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헤어진 후로는 줄곳 황량하고 쓸쓸한 곳에만 있었던 데다가 날씨마저 우중충해서 우린 알게 모르게 많이 가라앉은 듯했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를 떠나 부다페스트로 가던 날을 빼고는 보통 2시간 이상은 잘 이동하지 않았던 우린 덩케르크를 아침 일찍 출발해 그날 오후 파리에 도착했다. 그만큼 에너지가 절실했기 때문일까, 약 5시간 거리를 주유를 할 때를 빼고는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이에게 우리가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던 파리의 장소들을 하나하나 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사랑이는 아무런 생각이 없겠지만 불과 몇 달 전엔 혜아와 나 단 둘이었는데 이번엔 사랑이와 함께 셋이서 걸을 수 있다니 너무나 기대가 됐다.
파리에 들어서자 고향 동네에 돌아온 듯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샹젤리제 거리 정박지에 다다르니 감회가 새로웠다. 달랑 10유로를 지갑에 넣어놓고도 걱정거리 하나 없이 지냈던 곳에 도착하니 그때의 에너지가 벌써부터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박지는 몇 달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사실 그 정박지는 노상 주차장 한 켠에 그 어떤 구획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다. 주차선도 그려져 있지 않았을뿐더러 보통 도로 옆 가장자리에 흰색 실선이나 노란색 실선이 그어져 있으면 그곳엔 주차를 해서는 안되는데 그런 선도 없었다. 때문에 유럽 전역에서 온 캠핑카들이 그곳에 주차를 해도 단속을 할 근거가 없었고 당연히 경찰도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지나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주차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2개월 동안 편안하게 먹고 잤던 파리의 정박지가 유료 주차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마음 놓고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바로 옆 수돗가에서 물도 공짜로 채우고 근처 공중화장실에서 변기도 비우고 또 여행 중인 한국 사람들을 만나 차 뒤에 테이블을 펼치고 술을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던 곳이었는데 말이다.
캠핑 앱의 리뷰를 보니 주차선은 그어져 있지만 여전히 정박해도 괜찮다는 글들이 남겨져 있었다.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선은 그어 놨지만 아직 행정처리가 안돼서 단속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주위에 몇 대의 캠핑카가 세워져 있긴 했다. 그래서 우리도 일단 예전에 세웠던 곳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며칠 전에 눈이 왔었는지 파리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우리의 정박지도 지나다니는 차들로 검게 더럽혀진 눈들이 쌓여 있었지만 사랑이는 신나게 정박지 뒤편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그런데 변한 것은 주차선뿐만이 아니었다. 겨울이라 근처 수돗가들은 물이 끊겨 있었다. 우린 당장 물이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지만 정말 급하면 큰 생수를 사다가 넣으면 되는 것이니 일단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한여름 파리에서 지내면서 우리의 사무실이자 거실이 되어주었던 스타벅스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가서 당당하게 라떼를 각각 한잔씩 시켜 들고 여유롭게 창밖을 내다보며 앉아 있고 싶었다. 텀블러에 주스를 채워 넣고 둘이 나눠 마셨던 당시보다는 돈이 많으니 정박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사랑이와 함께 샹젤리제 거리 구석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그동안 개를 사랑하는 유럽인들 덕분에 웬만한 식당이나 카페에도 사랑이와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거의 짖지 않는 사랑이 덕분에 걱정 없이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카페에서 몇 시간을 보내도 사랑이는 조용히 자기 간식을 먹거나 잠을 잤다. 동유럽이 그 정도였는데 개를 사랑해 마지않는 프랑스는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게 분명했다.
겨울이라 길거리에 사람들은 여름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여행객들은 밝은 모습으로 우릴 지나갔다. 날씨는 우중충 했으나 예상한 대로 활기찬 도시의 분위기 덕분에 우리의 기분이 다시금 좋아지고 있었다. 역시나 주변 환경에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밴라이프의 특성 때문이리라.
항상 콘센트를 꽂을 수 있고 편안하게 오래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잡느라 눈치 싸움을 벌였던 그곳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혜아는 우리가 주로 앉았던 자리로 사랑이를 데리고 들어가 미리 앉았고 난 돈 많은 부자가 된 사람 마냥 라떼 두 잔을 주문하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섰는데 점원은 개를 데리고 들어올 수 없으니 나가라고 했다. 왜 안되냐고 물어봤지만 당연히 영어를 못하는 점원들은 자기들끼리 몇 마디 숙덕 거리고 나서는 이곳의 정책이라며 개는 들어올 수 없다는 말만 했다. 쫓겨난 스타벅스 매장 문 앞에는 개 출입금지 표시가 있었다.
크로아티아를 출발하고 나서 동유럽을 지나오는 동안 인터넷을 쓰기 위해 수많은 스타벅스를 갔지만 단 한 번도 개의 출입을 막은 곳은 없었다. 항상 식당이나 카페를 들어가기 전에는 개의 출입이 가능한지 직접 확인을 해왔고 스타벅스는 언제나 개를 환영한다는 회사의 정책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파리의 스타벅스만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파리의 개 주인들이 매장 안에서 개들의 오물을 제대로 치우지 않거나 사람들이 앉는 의자에 흙이 묻은 개를 그냥 앉히는 등 에티켓에 어긋나는 행동을 너무 많이 해 개의 출입을 막는 곳이 많다고 한다.
어쨌든 쫓겨난 우리는 실망과 짜증이 동시에 몰려왔다. 겨울의 파리는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미워 보였다. 길 위의 눈도 그렇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도 그렇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다른 카페를 가면 될 일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박지는 주차장이 되어버려서 마음을 졸이고 있어야 했으며 물은 떨어져 가는데 채울 곳은 없고 우중충하게 추운 날씨에 몰상식한 개 주인들 덕분에 사랑이까지 홀대를 받으니 단 일 초도 파리에 있고 싶지 않아 졌다.
장소를 이동할 때 우린 보통 길게 의논을 하는 편인데 그럴 필요조차도 없었다. 혜아도 그곳에 더 이상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린 그 길로 밴으로 돌아가 차를 몰고 바로 파리를 떠나버렸다. 목적지도 정박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그저 최대한 빨리 그곳에서 멀어져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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