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한 3년 전쯤 산 워커만 밑창 한쪽이 다 닳아 없어진 채로 신고 있다가 우리도 운동을 하며 사는 인간이 되어보자고 크로아티아 동네 할인매장에서 큰 결심을 하고 5만 원에 구입한 겨우 딱 한 달 신은 새 운동화였다. 결심과는 다르게 운동이라고는 스플리트 뒷산 한 번 올라간 게 전부였지만 폭신폭신한 밑창의 신발을 신어본 게 얼마만인지 몰라 하루하루 걸을 때마다 감격을 하고 있었더랬다. 새 이빨이 올라오고 있어서 가려운 사랑이가 자꾸 신발끈을 씹어대서 혹여나 신발의 뒤꿈치 ‘에어’를 터뜨리지 않을까 이리저리 숨겨가며 아껴 신었더랬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하게 다뤘던 신발을 밖에 벗어놓고 들어온 내 자신이 그리 놀랍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잡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던 난 집중을 하지 않으면 하고 있는 행동들을 인식하지 않았고 때문에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을 나설 때 내 손에 키가 있는지 어느 주머니에 넣었는지 집중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좁은 밴 안에서도 물건을 잃어버리기가 일쑤였는데 내가 방금 카메라로 관심 있는 무언가를 찍다가 다른 일에 정신을 뺏기면 그 순간 난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어딘가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렇게 난 무의식적으로 신발을 차 문 밖에 가지런히 벗어놓고 밴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것 외에는 달리 왜 신발이 사라졌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뒤늦게나마 문을 열어보았지만 이미 신발은 사라지고 없었다. 3년 된 낡은 워커를 버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발레리나 친구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니 한국에 살고 있는 동생이 메신저를 통해 나에게 어딘가 정착해 민박집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아빠가 걱정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리지만 정신연령은 훨씬 높아서인지 좋은 직장을 다니며 착실히 돈을 모아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는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매 주말마다 조카들과 함께 아빠 집으로 찾아가 저녁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이야기 주제의 절반이 내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마침 민박집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얘기는 혜아와 종종 나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런던의 민박집에서도 일을 한다기보다는 즐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둘 다 일이 잘 맞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지구 어딘가에 민박집을 조그맣게 차려서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또 때로는 그들을 도와주기도 하자며 큰 기대에 부풀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정작 그럴만한 돈은 없었기에 먼 미래 언제가 일어날 일 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의 얘기를 듣고 보니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소하게 시작한다면 근시일 내에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중충한 동유럽의 주차장에 세워 둔 밴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더욱더 멀쩡한 집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깊은 고민은 차차 하기로 하고 난 동생에게 해보겠다고 답했다.
수많은 여행객들에게 쓸려 다니며 정신없이 스냅 촬영을 하고 겨우겨우 혜아의 지인들도 모두 만나고 나니 2018년의 마지막 날이 되어 있었다. 혜아를 만나던 날부터 오늘까지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하나하나 모두 머릿속에 기억될 만큼 인상적인 모험을 했던 한 해였기에 특별하면서도 소박하게 보내고 싶어서 우린 프라하 성 옆의 야산 위 주차장으로 밴을 옮겼다. 프라하 도시 전체에서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2018년 한 해는 계획에 없었던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계획은 커녕 상상 조차 해 본 적 없는 일들을 겪은 일 년이었다. 유럽을 돌아다니며 차가 고장 나고 물탱크가 부서지고, 한여름엔 찜통이며 한겨울엔 얼음장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우리는 밴라이프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천 원짜리 맥주에 싸우고 닭 한 마리로 삼시 세끼를 먹고, 연료가 다 떨어져 주차장 한복판에 멈춰서는 것을 예상했다면 우린 30만 원 남짓만 들고 영국을 출발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프라하 성의 근처 야산에서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보며 그동안 지나온 아찔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생각의 저편으로 멀어질 때 즈음 2019년 1월 1일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그동안 유명한 도시들에서 봐왔던 불꽃놀이 중에 가장 평범하고 가장 어수선한 불꽃놀이였지만 혜아와 사랑이가 함께 보고 있었기에 그 어느 때 보다 특별했다. 혜아와 사랑이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난 같은 곳을 보며 여기까지 온 우리가 앞으로도 같은 곳을 향해 갈 수 있길 기도했다. 그동안 신나게 고생했으니 이제는 웬만하면 고생처럼 느껴지지 않길 기도했고 이제는 아무런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길 기도했다. 그리고 프라하 시내 전체가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찰 때 즈음 불꽃놀이가 끝이 났고 우린 밴으로 걸어서 돌아왔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네덜란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열혈 팬인 혜아와 난 한 에피소드의 배경지이자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의 실제 격전지인 누넨(Nuenen)을 가보기 위해서였다. 체코를 출발해 독일을 이틀 만에 가로질러 네덜란드에 들어갔다. 누넨 시내 주변에는 정박지가 없는 듯해서 시내 외곽의 야외 체육시설이 있는 곳의 드넓은 주차장 구석에 주차를 했다. 보통은 이런 탁 트인 주차장을 피하는 편이지만 저녁 9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고 어차피 내일 일찍 누넨 시내로 들어갈 테니 저녁을 먹고 얼른 잠들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잡고 밴 내부를 '정박 모드'로 정리하고 있는 와중에 저 멀리 주차장 입구로 경찰차가 들어오더니 천천히 우리 밴 옆으로 다가와 멈췄다. 과연 경찰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인 듯했지만 차에서 내린 상당히 점잖고 경험이 많아 보이는 경찰은 꽤나 유창한 영어로 어디에서 왔는지 이곳에 왜 왔는지 등을 조근조근 물었다. 나 혼자 있었다면 녹슨 밴에 허름한 의상 때문에 의심을 좀 샀겠지만 혜아와 사랑이까지 있으니 크게 경계하지 않는 듯 친절한 어투였다.
점잖은 경찰은 공용 주차장에서 잠을 자는 것은 안되지만 깨끗하게 있다가 간다면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주차장을 떠났다. 역시나 새벽이 되니 주차장 이곳저곳 으슥한 구석에는 의심스러운 차들이 오고 갔지만 우리에게 위협적이지는 않은 듯했다.
사실 밴라이프 초반 프랑스에서 우린 주로 큰 마트 주차장에서 주로 밤을 보냈다. 왠지 모르게 안전한 느낌이 들었으며 마트에서 나오는 와이파이 신호 덕분에 공짜 인터넷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벽이 되면 어린 친구들로 보이는 프랑스 애들이 시끄럽게 개조된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끌고 나와 타이어가 닳아 터질 때까지 주차장을 쓸고 다녔다. 시끄럽기도 했지만 혹시나 맨 정신이 아닌 상태일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물론 문제가 된 적은 없었지만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프랑스 친구가 마트에 주차를 하면 경찰이 딱지를 뗄 수도 있다는 말에 그 후에는 단 한 번도 주차장을 이용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의 첫날밤도 큰 문제없이 지나갔다.
누넨은 정말 작은 마을이었는데 마을 초입에 밴을 주차하고 잠깐 걸어 들어가니 드라마에서 보았던 전쟁 당시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드라마도 그 당시의 지형과 건물들을 고증을 통해 그대로 재현에 촬영을 했다고 들었는데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새로운 간판이 달려 있을 뿐 우린 어디에서 미군 탱크가 들어왔고 어디에서 독일군들이 매복해 있었는지 다 기억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거의 다 그대로였다.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하며 분위기를 더 느끼면 어떨까 싶었지만 사실 우린 추웠다. 마땅한 겨울 옷이 없었던 우리 머릿속에는 빨리 따뜻한 나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격전지도 좋고 실제 주인공들이 머물며 사진을 찍었던 곳도 좋지만 우린 너무 추웠다. 등유 난로는 경유 때문에 심지어 절반 이상 타버려서 난로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고 그나마 있는 얇은 외투도 여전히 이가 간지러운 사랑이가 물어뜯어 구멍이 나고 너덜너덜 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누넨을 출발해 드라마의 배경이 된 실제 장소를 몇 군데 더 둘러본 뒤 해가 질 때 즈음 혜아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리고 좁은 수로와 도로 때문에 시내에 정박을 하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작은 암스테르담은 프라하 보다 더 밴을 정박할 곳이 없었다.
결국 하염없이 암스테르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공짜 주차를 포기하고 밴라이프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캠핑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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