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an Jun 17. 2020

에어비앤비는 불편해야만 했다

#34

혜아는 10월부터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기 시작한다. 일 년 중에 혜아가 가장 기대하는 날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면 신이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혜아를 만나고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린 체코 프라하에서 숙소를 하루 잡아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다. 혜아가 프라하에 가보고 싶어 했고 크로아티아에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된 한국인 발레리나가 크리스마스 휴가에 맞춰 프라하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체코 프라하까지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프라하에서 마땅한 정박지를 찾을 수 없어서 우린 빈에서 두 번째 스냅 촬영을 끝내고 다시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주차장은 무료였고 필요한 시설들이 주변에 모두 있었으며 이 전에 며칠 있어봐서인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브라티슬라바의 날씨는 계속 우중충 했고 주차장이 강가에 있어서인지 꽤나 추웠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엎친데 덮친 격으로 며칠 전부터 난로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추위를 견디는데 쉽지 않았다. 동그란 띠처럼 둘러져 있는 난로 안 심지에 고르게 불이 붙던 전과는 달리 조금씩 불이 붙는 면적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불 조절도 쉽지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약하게 틀라치면 이내 불이 꺼져버리는 것이었다. 난로는 아무리 불 조절을 해도 한두 시간 이내에 이유도 없이 꺼져버렸고 밤에는 이불을 덮고 자면 추위를 견딜 수 있었지만 낮에는 자꾸 식어버리는 난로 때문에 차에서 버티는 게 힘들었다. 결국 우린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차를 주차장에 세워둔 채 에어비앤비를 통해 브라티슬라바 시내의 어느 작은 집을 빌렸다. 밴라이프를 시작한 이래 첫 '외박'이였다.

슬로바키아의 싼 물가 덕분에 집값은 큰 부담이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숙박에 돈이 들어갔으니 우리는 ‘뽕’을 뽑는데 혈안이 되었다. 먼저 샤워실이 눈에 띌 때마다 샤워를 하기로 했고 이불 빨래부터 그동안 밀린 속옷들과 한 번도 안 입은 옷들 까지도 세탁기에 세탁을 하며 와이파이가 있으니 띄엄띄엄 찍어 올리던 유튜브 영상까지 올리면 우리의 1박 2일은 전혀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빨랫방에서 빨래를 하는 것만으로도 집값 정도가 나왔으니 이미 충분히 숙박비는 뽑고도 남았다.

아담한 브라티슬라바의 숙소

밴라이프를 하면서 우린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사방이 콘크리트로 막혀 있고 문을 열면 또 다른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옆집만 보이며 항상 같은 곳에서 같은 사람들만 만나며 사는 게 얼마나 갑갑할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100만 원짜리 밴에서 생활하며 항상 새로운 곳에서 잠이 들고 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서 새소리에 눈을 뜨는 우리가 수 억 원짜리 콘크리트 집에서 사는 그들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확신했다. 밴에서 사는 동안은 정말 그렇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지내게 된 에어비앤비는 불편할 거 같았다. 아니 불편해야만 했다. 어딘가 어색하고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이며 빨리 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 정도로 불편할게 분명하다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어느 조용한 동네의 아담한 집에 들어서고 집주인이 키를 건네주고 떠나자마자 우린 무너져 내렸다. 냉소적인 자의식으로 무장을 하고 있던 우리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원베드룸의 집 한 켠에 놓여 있던 나지막한 침대에서, 그 위를 덮고 있는 어제 세탁한 듯한 뽀송한 이불 안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서 그리고 따뜻한 히터가 켜진 거실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하면서 사정없이 무너져버렸다.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미친 듯이 들었다. 혜아와 나는 집 안 이곳저곳을 고양이 마냥 부비고 다니며 이런 자그마한 집에서 아늑하고 고요하게 살고 싶다는 얘기를 나눴다. 에어비앤비에 들어온 지 반나절도 채 안되었는데 사랑이가 우리와 함께 집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했고 혜아가 소파에 앉아 무언가에 조용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으며 큰 고민 없이 주방의 물을 틀어 음식을 만드는 내 자신이 뿌듯했다. 분명히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시끄러운 밴을 타고 가면서 언제든지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으로 우린 충분히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외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절대로 이 집 문턱을 나서지 않을 사람들 같았다.

분명히 우리 밴이 더 좋아야만 했다. 좁지만 아늑해야만 했고 불편했지만 낭만적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돈 없이 밴라이프를 하며 돈도 많이 못 버는 일을 하지만 넓고 안전한 집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느라 자신의 인생을 즐길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밴라이프도 평범한 라이프와 별반 다를 게 없었고 우린 결국 하루를 더 연장해 이틀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보내고야 말았다.

브라티슬라바 숙소에서

원 없이 따뜻한 샤워도 하고 뽀송하게 빨래도 끝낸 뒤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밴으로 다시 돌아왔다. 며칠 뒤에 체코 프라하에서 사람들을 만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하루라도 더 집에 머물렀다간 다시는 밴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기도 했다. 혜아와 난 서로를 나무랄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게으르다. 사랑이를 산책시키는 일도 말없이 눈치를 보며 미루고 정박지가 마음에 들고 움직이기 귀찮으면 서로를 은근히 떠보다가 얼렁뚱땅 하루 더 눌러앉아버린다. 그러니 프라하로 가야만 한다는 마음에 문을 박차고 여전히 영하의 날씨로 나왔다.

난로는 심지에 붙은 그을음을 긁어내고 나니 불이 다시 조금은 잘 붙는 듯 보였다. 그제야 왜 등유난로에 경유를 넣으면 안 되는지 알게 되었다. 등유보다 기화가 덜 되는 경유의 특성 때문에 심지 끝에서 기화된 연료를 태우는 게 아니라 연료가 심지에 묻은 채 심지와 함께 타기 때문이었다. 심지가 타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연료를 빨아 올리지 못했고 그래서 자꾸 불이 꺼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탄 그을음 사이로 불완전 연소가 일어나니 마치 20년 된 버스 뒤에서 나오는 듯한 매연이 난로에 불을 붙일 때마다 뿜어져 나왔다.

하는 수 없이 난로에 불을 붙이기 전 심지의 그을음을 한번 털어낸 뒤 밴 밖에서 난로에 불을 붙이고 나서 연기가 안 나면 그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대신에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최대한 빨리 난로가 필요 없는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프라하로 가던 길 어느 정박지

동유럽 국가들은 서유럽에 비해 캠핑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부족했다. 물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은 고사하고 화장실을 비울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나마 겨우겨우 서비스 시설을 찾아가면 폐쇄되어 있었다.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동파를 막기 위해 동파방지 시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겨울 동안은 막아버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브라티슬라바로 오기 전 빈의 캠핑장에서 친절한 직원 덕분에 밴에 설치한 70리터 물통 외에 마시고 남은 5리터 짜리 물통을 5개나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은 생각보다 금방 차오른다. 정말 아껴 써야 5일 정도를 쓸 수 있다. 프라하까지 몇 시간 남지 않은 어느 작은 호수가 있는 공터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화장실이 곧 폭발할 것처럼 게이지가 가득 차올라와 있는 걸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정박한 곳은 여름에는 캠핑장으로 쓰이는 곳이었는지 곳곳에 물놀이 장비들이 버려진 것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조금 걸어 다니다가 어설프게 나무로 지어진 간이 화장실을 찾을 수 있었다. 시골집 재래식 화장실도 이것보단 깨끗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허름하고 더러웠지만 다행히도 추운 날씨 때문에 전부 다 얼어붙어 있어서 참을 만했다. 항상 지정된 장소에 버려야만 한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지만 밴라이프는 항상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그리고 그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주워진 환경을 적극 활용해야만 계속 살아나갈 수 있다.


우리는 물이 조금씩 새는 자동차 냉각수 통에 물을 채워 넣고 얼지 않게 부동액도 알맞게 섞어 넣은 뒤 어차피 어딜 가든 정박할 만한 편안한 자연 속이 없으니 바로 프라하로 가기로 했다. 



저희는 현재 석 달 가까이 머물렀던 영국 북부의 양 떼 목장을 떠나 한국으로 가기 위해 런던으로 내려와 있어요. 앞으로 영국에서 배를 타고 다시 네덜란드로 건너 가 유럽을 거쳐 러시아를 통과해 한국으로 갈 예정입니다. 두 달 안에 도착할 예정이라 제법 바쁘게 움직일 거 같아서 새로운 글은 이전보다 늦게 올라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항상 저의 글을 기다려주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분들을 위해 최대한 자주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www.youtube.com/cbvanlife

www.vanlifer.co.kr

인스타그램은 @lazy_dean

이전 06화 밴라이프, 현실과 SNS의 차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