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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n Jun 10. 2020

밴라이프, 현실과 SNS의 차이

#33

우리는 밴라이프를 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차박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심지어 우린 캠핑을 싫어했으며 지금도 싫어한다. 혼자서 밴을 타고 정처 없이 다니며 작품사진을 찍어서 무언가 해보겠다는 막연한 상상만으로 화물차를 사서 개조하다가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하던 혜아를 만난 후 캠퍼밴은 돈 아끼면서 살아가고 일하며 여행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되었다.

오로지 수단으로만 생각했기에 편안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걸 목표로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필수요소만은 갖추자는 생각으로 부엌과 샤워실 그리고 화장실 정도만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갖추고자 했던 필수요소 중에 세탁기도 있었다. 맨 처음엔 한국 전자회사에서 만든 작은 벽걸이용 세탁기를 넣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우리 밴에 들어가기엔 크기가 너무 컸고 가격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게 비쌌다. 그다음에 찾아낸 것이 중국제가 아닐까 싶었던 소형 통돌이 세탁기였다. 고정할 필요도 없고 그리 많은 전기를 먹지도 않으며 적은 물로 빨래를 할 수 있는 세탁기라고 해서 우리 밴에서 쓰기엔 딱인 듯했다. 하지만 속옷 말고는 그 안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았고 이불은 커녕 바지나 티셔츠는 절대 빨 수 없을 거 같았다.

결국 밴에는 세탁기를 설치하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불편한 적이 없었다. 우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씻었으며 속옷을 잔뜩 쌓아두고 입었기 때문에 속옷이 모자를 일이 없었다. 게다가 둘 다 패션에 큰 관심이 없어서 특별한 외출이 아니고서는 옷 한 벌로 지내는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빨래를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아직 배변 훈련도 다 되지 않았고 밴라이프도 어색한 사랑이 때문에 우린 본의 아니게 세탁비에 많은 돈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밖에서 소변을 봤지만 조금이라도 사랑이의 신호를 놓치면 여지없이 그 자리에서 오줌을 눴다. 크로아티아를 출발해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할 때까지 사랑이는 주로 부엌 앞의 발판이나 찬기가 올라오는 걸 막을 요량으로 깔아 둔  바닥 담요에 볼 일을 봤었다. 그런데 이 날은 이불 위에다 오줌을 싸버렸다. 덩치가 커서이기도 하지만 또 얼마나 참았었던 건지 우리 셋이 덮어도 넉넉할 정도로 큰 이불을 전부 다 적신 것 같았다.

잘 때엔 난로를 껐기 때문에 이불이 없으면 추위를 막을 방법이 없어서 결국 사랑이의 오줌으로 젖은 이불과 담요들을 큰 캐리어에 구겨 넣고 영하 10도에 가까운 오스트리아 빈의 한 겨울밤 거리로 나섰다. 24시간 무인으로 운영되는 빨랫방을 찾았지만 트램(지상으로 다니는 전차)을 타고 여섯 정거장을 가야 하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었고 트램 티켓도 딱 두 장만 있었기에 비용 절감을 위해 나 혼자만 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여행객들이 많은 도시라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내 모습은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았으며 빨랫방은 핸드폰 앱만 있으면 이용할 수 있는 무인이라서 세탁과 건조를 하는 두 시간 내내 마음이 편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크리스마스 마켓

SNS로 보이는 밴라이프는 밴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봐도 부러울 정도로 낭만적이고 여유롭다. 눈부신 해변에서 햇빛을 즐기거나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밴 앞에 깔아 놓고 커피를 즐기고 반짝이는 알전구를 둘러놓고 별빛을 헤아리는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밴라이프에 대한 환상이 절로 일어난다. 우리도 밴라이프를 시작할 때에는 이런 꿈을 꿨었다. 아름다운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밴을 세워 놓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예쁘장한 그릇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예쁘게 플레이팅을 한 뒤 여유롭게 먹으며 사진 한 장 찍어주는 그런 밴라이프를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였다. 캠핑 앱과는 달리 막히거나 없어진 정박지들을 돌고 돌아 몇 번의 실패 끝에 아름다운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해가 거의 다 진다. 곧 배가 고파지니 부랴부랴 밥을 하다 보면 어영부영해가지고 겨울엔 추워서, 그리고 여름엔 벌레 때문에 차문을 활짝 열어놓고 밥을 먹을 수 없다. 예쁘장한 플레이팅을 할 정신도 없이 배가 고파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면 대부분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곳은 정식 주자창이나 캠핑장이 아니기에 낭만적인 반짝반짝 알전구를 밝히며 우리의 불법 야생 캠핑을 광고하며 밖에 있을 수 없어서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커튼을 꽁꽁치고 밴 안에서 뒹굴며 쉰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날도 종종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집이 밴이라는 것일 뿐 일반적인 삶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바쁘고 피곤했다. SNS에서 볼 수 있는 사진을 찍으려면 몇 주 전부터 잘 쉬면서 살을 좀 찌우고 피곤을 푼 뒤에 한 이틀 시간을 잡고 밴 내부를 청소하고 정성을 들여 하루 종일 셋팅을 하고 나서 수 시간 동안 카메라를 이리저리 옮기고 억지미소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불쌍해 보일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밴 내부는 한국에 있는 내 방과 다를 바 없이 지저분했으며 하루 종일 예쁘게 세팅하기에 우린 너무 게을렀다. 그리고 그 시간에 우린 다음 날 어디로 가야 할지, 물은 얼마 남았고 화장실은 어디서 비워야 할지를 찾아야만 했고 앞으로 돈을 얼마큼 쓰고 기름을 얼마큼 넣어야 할지 계산을 해야 했다.

낭만은 사진 속에만 있었고 현실의 밴라이프는 그저 또 다른 삶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세탁과 건조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커다란 이불과 이불보 그리고 담요를 세탁방의 가장 큰 세탁기에서 뜨거운 물로 깨끗하게 빨아 건조기로 뽀송하게 말리는데 총 12유로가 들어갔다. 우리의 일주일치 식비가 빨래비로 두 시간 만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어쨌든 다시 섬유유연제 향기를 퐁퐁 풍기는 빨랫감들을 캐리어에 챙겨 넣고 왔던 길을 돌아 트램을 타고 밴으로 돌아오니 거의 밤 11시가 되어 있었다. 사랑이는 자신 때문에 내가 한밤중에 오줌에 젖은 이불들을 싸들고 오스트리아 빈의 밤거리를 휘젓고 다닌 걸 아는지 모르는지 편하게 먼저 잠들어 있어서 잠깐 짜증도 났지만 곧 우리도 오랜만에 깨끗한 이불을 덮고 따뜻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크리스마스 마켓은 일요일을 맞아 사람들이 더 많은 듯했고 날씨는 더 추운 데다가 눈까지 내리면서 카메라가 눈을 맞고 오작동을 일으켰지만 무사히 스냅 촬영을 마쳤다. 원활한 촬영을 위해 사랑이를 밴 안에 남겨두고 오는 바람에 온종일 신경이 쓰여서 촬영이 끝나자마자 곧장 밴으로 돌아갔다. 우린 사랑이 때문에 여행을 하는데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한복판의 주차장

다음 날이 월요일이라 빈 자연사 박물관 주차장엔 더 이상 공짜로 주차를 할 수가 없었고 그전에 있던 빈 외곽 공원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물가가 비싼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서 지내다가 다시 오기로 했다. 삼일 뒤에 같은 장소에서 또 스냅 촬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빈에서 브라티슬라바까지는 삼십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브라티슬라바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다뉴브 강 옆으로 아주 큰 비포장 주차장이 있었다. 그곳은 무료인 데다가 바로 옆에는 사랑이를 산책시킬 수 있는 넓은 공원과 큰 쇼핑몰이 있었고 강가의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와이파이 신호가 잡혔다. 우리에겐 삼 일을 보내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브라티슬라바의 물가는 빈과 비교해 무척이나 저렴했다. 식재료값은 물론이고 기름값도 저렴해서 우린 브라티슬라바에서 등유난로에 넣을 경유를 사기로 했다. 이동을 하지 않으니 밴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다 보니 난로를 켜놓는 시간도 길어져서 빈에서 사둔 10리터의 경유는 금세 바닥이 났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브라티슬라바에는 BP 주유소가 없었다. BP의 고급 경유를 써야만 등유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는데 BP 주유소는 커녕 고급 경유를 파는 주유소가 없었다.

그래서 우린 이번 기회에 일반 경유로 등유 난로를 문제없이 쓸 수 있는지 실험해 보기로 하고 동유럽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주유소에서 일반 경유를 보조 기름통에 가득 채웠다.


일반 경유를 엔진 클리너와 함께 등유 난로에 넣은 첫날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불을 붙이는 초반에는 약간의 연기와 냄새가 났지만 불이 붙고 나서는 활활 잘 타올랐다. 난로의 불꽃은 골고루 퍼져서 빨갛게 달아올라 따끈따끈했다. 기름도 좀 덜 먹는 것 같았다. 우린 따뜻한 며칠 밤을 보내고 두 번째 스냅 촬영을 위해 다시 빈으로 향했는데 난로는 이때부터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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