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an Jun 05. 2020

밴라이프는 낭만적이지 않다

#31

기분이 상한 난 혜아와 사랑이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때부터 주위에 있는 모든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우리를 째려보는 듯했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이미 약속시간은 너무 늦어버렸고 약속 장소까지 갈 방법이 없어 지인에게는 사정을 설명한 뒤에 약속을 취소하고 밴으로 다시 터벅터벅 걸어 돌아왔다. 너무나 허탈하고 힘이 빠졌지만 돌아와 검색을 해보니 오스트리아는 모든 공공장소에서 개에게 입마개를 채워야 한다는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택시나 버스가 우리의 탑승을 거부했던 듯했다.

몰랐던 우리의 잘못이었고 앞으로는 입마개를 구해서 다니면 될 터이니 더 이상 스트레스받지 않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밴에서 푹 쉬기로 했다. 넓고 조용한 공원과 한겨울인데도 푸릇푸릇한 나무들 덕분에 밴에 있는 우리 기분은 금세 좋아졌다. 약속 때문에 서둘러 나가느라 걸렀던 밥도 해 먹고 사랑이랑 다시 공원으로 나가 간간히 비치는 햇빛을 맞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 우리 밴 옆에 새로 들어온 다른 이웃 밴라이퍼가 사랑이 크기의 개를 두 마리나 데리고 있어서 사랑이가 아이들과 같이 노는 동안 비눗방울 공연을 연습하고 있다는 스페인-오스트리아 커플 밴라이퍼와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다.

공원을 떠다니는 스페인 커플의 비눗방울

풀타임으로 밴에서 산다는 건 항상 물이 부족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어도 물은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펑펑 쓸 수 없고 물탱크가 비어 가고 있으면 물을 구할 때까지 아껴 써야 한다. 때문에 설거지 할 때에도 싱크대의 물은 졸졸졸 흐르게 틀어야 하고 샤워도 시원하게 물을 세게 맞아가며 씻을 수 없다. 겨울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냄비 중에 가장 큰 것을 골라 물을 가득 받아 끓인 뒤에 대야에 조금씩 덜어 찬물과 섞어서 씻어야 한다. 상당히 귀찮지만 물을 쓸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하고 뜨겁게 데울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감사했다.

그러나 혜아에게 현실은 나보다는 더 불편하고 힘든 것이었다.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적은 물로만 감는 일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를 다 적시는 것도 샴푸를 헹궈내는 것도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아주 적은 물로, 그것도 좁아터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할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우린 그렇게 열심히 매일매일 씻어대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일주일에 한두 번만 겪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샤워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공원 정박지를 물끄러미

결국 밴으로 돌아온 혜아는 긴 머리카락을 자르기로 결심했다. 물론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며 인터넷과 유튜브로 머리카락 자르는 법을 검색하고 후기 등을 찾아본 뒤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좀 뜬금없이 느껴졌다. 게다가 내가 잘라줘야 한다니 잘못되면 비난은 다 내 몫이 될 터였다. 하지만 각박한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치이고 약속도 취소되고 나서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던 혜아를 위해 이보다 좋은 기분전환은 없을게 분명했다. 손바닥만 한 밴에서 한 명이라도 기분이 다운되면 금방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니까 말이다.

혜아의 오랜 리서치에 따르면 긴 머리카락을 살짝 적신 다음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돌돌 말아 틀어쥔 뒤 자르고 싶은 만큼 틀어쥔 손 위에서 잘라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고 영상을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툭 잘라내는 것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혜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를 맡겼고 나는 자신감 있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 한 번에 잘랐다. 그리고 인터넷이나 영상에서는 좋은 가위가 필수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걸 바로 알게 되었다.


만나기로 했던 지인은 알고 보니 며칠 전 살고 있던 아파트에 불이 나는 바람에 엄청나게 비싼 수리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직접 복구를 하고 있었다. 낮에는 집 안의 그을음을 조그마한 수세미로 문질러 지우고 밤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터라 우리를 만나기로 했던 날은 정말 흔치 않은 소중한 쉬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사랑이의 입에 입마개를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공공장소에 간 우리의 잘못으로 약속이 취소되고 지인의 소중한 쉬는 시간을 망쳤으니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다.

그래서 집수리를 도와주기로 했다. 우리가 얼른 가서 같이 후다닥 화재의 흔적을 수리해주고 밥도 같이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 같았다. 오스트리아도 퇴근시간 이후에는 길거리 주차가 공짜여서 이번엔 밴을 타고 지인의 아파트로 가 근처에 주차를 했다. 그리고 지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에 깜짝 놀랐다. 거의 모든 벽이 천정까지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뒤덮여 있었다. 아파트 천정은 우리나라 아파트에 비해 두 세 배는 높아 보였고 그 때문인지 불에 다 타버린 가구를 치워버렸다는 텅 빈 집은 더 암울해 보였다. 벽의 한 켠은 다른 곳과 달리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부분은 며칠 동안 혼자서 수세미로 문질러서 닦인 곳이라고 했다. 나와 비슷하게 오랜 기간 오스트리아에서 유학생활을 해온 지인이 혼자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또한 영국에서 집 때문에 혼자서 너무나 오랫동안 고생한 적이 있었기에 그 무엇으로도 지인을 위로하거나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이 혼자 신나서 집 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동안 우리는 지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그을음을 차근차근 지워나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을음을 지워내진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근처 마트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기 전까지 지인을 도와주고 나서 우린 삼겹살과 맥주를 사다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원베드룸이었던 지인의 집은 방만 불탔을  부엌 쪽은 괜찮았지만 가스는 커녕 전기도 끊겨 있는 상태여서 우린 아파트 앞에 주차해  우리의 밴에 침대를 접고 모여 앉아 맥주에 삼겹살을 난로 위에서 구워 곁들였다. 등유난로는 정말  샀다는 뿌듯함이 들만큼 늦은 시간까지 수다를  우리를 따뜻하게  주었다.

이날은 우리의 고물 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빈의 주택가 한복판 주차장에서 만나고 싶었던 지인과 둘러앉아 따뜻한 난로를 쬐며 술과 음식을 먹을  있게 밴이 너무나 완벽한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로 삼겹살 구이

하루 종일 눈이 보슬보슬 내리던 밤 지인은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기 위해 너무 늦지 않게 출발했고 우리도 곧 있을 스냅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지금껏 머물렀던 멀리 떨어진 외곽 공원이 아닌 빈 시내 한가운데로 향했다. 빈 시내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 Vienna)의 주차장은 주말에 공짜였고 주차장 근처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즐비했기 때문이었다.

한밤 중에 도착한 자연사 박물관 주차장은 널찍하고 한가로웠으며 박물관 건물은 관련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역사가 오래되어 보였다. 다음  주차장이 가득  테니 최대한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너무 구석지지 않은 장소를 골라 밴을 주차하고 나서  그렇듯 사랑이도 산책시키고 정박지 주변의 분위기도 파악할  밴을 나섰다. 박물관은 주차장을 감싸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뒤편에 길고 우뚝하게  있었고  앞으로는  덮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사랑이를 산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고 사람들이 많아지는 낮에도 우리는 오히려 크게 눈에 띄지 않을  같은 이었다.

주말을 보낼 빈 시내의 주차장

주말 동안 머무르기에 너무나 좋은 곳이라는 확신이 들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밴으로 돌아왔다. 지금처럼 드넓은 주차장에 있어도 밴의 문을 닫는 순간 그 공간만큼은 우리의 공간이 되었다. 작고 넓은 우리의 집이 생겼다. 문을 닫고 들어와 앉으면 집에 들어온 듯 포근하게 모든 근심 걱정이 다 날아갔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를 따뜻하게 보호해주고 있는 난로에 넣을 등유가 이제 딱 한 병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검색을 해서 또 등유를 사면 되는 거였지만 우린 좀 더 싸고 좀 더 쉽게 난방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난방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에 꽤나 많은 사람들(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이 등유 난로에 값싼 경유(디젤)를 넣어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 많은 이야기는

www.youtube.com/cbvanlife

www.vanlifer.co.kr

인스타그램은 @lazy_dean

이전 03화 헝가리의 악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