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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n May 30. 2020

부다페스트 한복판에서 밴라이프

#29

상점들이 문을 닫는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등유를 살 수 있었다. DIY숍도 갔었고 캠핑용품점도 갔었으며 심지어 자동차 부품점까지 갔었지만 설마 팔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길가에 덩그러니 있는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철물점에서 등유를 팔고 있었다. 겨울은 이제 시작이니 한참을 쓸 수 있을만큼 사야겠다는 생각에 1리터 짜리 PET 병에 든 등유를 10병 샀다.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난방에 필요한 모든걸 다 구한 우린 바로 부다페스트로 가서 잠을 자기로 했다. 딱히 근처에 마땅한 정박지가 없기도 했으며 삼일 동안 난로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느라 크로아티아를 출발하고 나서 한번도 여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다페스트 여행을 하기로 했다. 

보통 부다페스트 처럼 작은 도시엔 밴을 정박할 만한 공간이 있을리 만무하고 사랑이를 산책 시키는 것도 쉽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우린 도심 한복판, 그것도 다뉴브 강 바로 옆에 정박 할 수 있었다. 강변도로의 중앙선을 따라 놓인 주차장이었지만 한밤중인데도 이미 많은 차들로 북적이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섞여들 수 있었다.


최대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여기저기의 창문들을 커튼으로 가리고 나서 기대를 한가득 품은 채 난로에 등유 한 병을 다 부어 넣은 뒤 불을 붙였다. 난로는 기대이상이었다. 불을 붙이자마자 활활 타올랐고 약하게 틀어도 밴 안은 금새 뜨끈뜨끈 해졌다. 냄새도 안나고 연기도 피어오르지 않는 것이 너무나 완벽한 난로였다. 이제 겨울은 거뜬히 날 수 있을거 같았다. 

그래도 싸구려 난로이다보니 과열이나 화재에 대비한 장치가 없어서 만일을 대비해 잠들기 전에는 난로를 껐다. 때문에 문틈 사이로 미친듯이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밴 안은 금방 식었고 잘 때 추운건 마찬가지였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불을 붙이기만 하면 얼굴이 떨어져 나갈 듯한 추위는 사라졌다. 

난로를 끄면 열기가 오래 가지 못하고 금새 사라지는 바람에 정박하고 나서는 왠만하면 계속 난로를 켜두어야만 했다. 천정 창문을 열어놓으니 일산화탄소 중독 걱정은 없었고 연기나 냄새도 나지 않으니 난로를 켜두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연비였다. 1리터의 등유는 난로 연료탱크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고 아무리 불을 약하게 조절해도 3시간도 채 안돼서 연료탱크 안의 등유를 다 태워버렸다.

철물점에서 1리터에 3유로가 넘는 가격으로 샀으니 일반 경유나 휘발유보다 3배나 비쌌고 주유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따지고 보면 2~3일에 한번씩 등유를 사기 위해 사방팔방 헤매고 다녀야 하며 매일 10리터에 가까운 매우 불이 붙기 쉬운 기름을 차에 싣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었다. 우린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음 날 부다페스트는 흐렸지만 다행히도 춥지는 않았다. 전날 밤 잠들기 전에 얼마나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아름답길래 그렇게들 난리인지 직접 눈으로 보기도 할 겸, 사랑이와의 첫 산책도 할 겸 다뉴브 강을 따라 산책을 나갔지만 산책은 커녕 혜아는 사랑이와 정신없이 찬 바람을 맞으며 뛰어다니고 끌려다닌 덕분에 다음 날 까지도 마라톤을 뛴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그래도 춥지 않은 날씨 덕에 첫 한겨울 밴라이프의 정박지인 부다페스트 여행을 하기로 했다. 

지쳐 잠드신 두 분

혜아와 사랑이가 지난 밤 광란의 질주에서 에너지를 좀 회복한 오후 우린 부다페스트 시내 구경에 나섰다. 부다페스트의 유명한 관광지들도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싶었고 시내에 한인마트가 있다고 해서 라면도 살 계획이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옷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사진에 잘 나오고 추위까지 막아 줄 수 있을만한 것들을 껴입고 밴을 나섰다.

가장 유명하다는 부다 성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걸어야 했다. 우린 크로아티아를 떠나기 전 앞으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여행지도 많이 걸어다니자며 시내 할인 매장에서 운동화를 산 터라 걷는 건 자신 있었다. 사랑이는 아직은 우리와의 산책이 익숙하지 않은 듯 했고 우리 또한 반려견과의 산책에 대한 아무런 경험 없이 무작정 목줄만 걸고 나섰지만 금새 우리는 한 가족처럼 신이 나서 걷다보니 힘든 줄도 모른 채 금새 부다 성에 도착했다.


꽤나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부다 성은 바람도 제법 불고 상당히 추웠지만 여행객들이 많았다. 지나가는 여행객들은 사랑이를 보며 귀여워서 폴짝폴짝 뛰었고 덕분에 우리는 조금 가다가 멈춰서길 반복하느라 멀리가지 못하고 금새 지쳐 버렸다. 다행히도 유럽은 많은 식당이나 카페들이 개들의 입장도 허용하고 있어서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몸도 녹이며 화장실도 쓰고 커피도 마시며 쉬었다. 게다가 종업원은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예쁜 강아지 발바닥 그림이 그려진 그릇에 물을 떠서 사랑이에게 건내주기까지 했다.

카페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금새 해가 졌다. 날씨는 더 추워졌지만 부다 성 위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고 우리도 왠지 모르게 더 들떠서 다시 부다 성 위를 휘젓고 다녔다. 요구사항이 까다로우신 혜아의 사진을 이리저리 바닥을 뒹굴어 가며 찍다보니 배가 고파져서 우린 한인마트도 가고 혜아가 좋아하는 햄버거도 과감하게 사 먹을 겸 부다페스트 시내도 들어가기로 했다. 

부다 성에서 내려와 다뉴브 강을 가로지는 꺾여 있는 모양의 마가렛 다리를 지나니 화려한 조명과 연말의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시내가 나왔다. 파리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우리도 무언가를 사 먹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돈이 주머니에 있어서인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명한 여행지가 아닌 부다페스트 사람들이 사는 곳의 골목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다가 우린 찾아 두었던 햄버거 집에 들어갔다. 역시나 사랑이도 같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혜아는 햄버거를 정말이지 너무나 좋아한다. 영국 런던에서 그리고 프랑스 샤모니에서도 외식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유명하다는 햄버거 집을 찾아내 먹곤 했다. 부다페스트의 햄버거도 인상깊지는 않지만 맛있었고 주인이 상당히 친절했다. 많지는 않은 팁을 조금 놓고 나왔는데 주인이 뛰쳐나와 부다페스트는 계산서에 팁이 모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따로 더 줄 필요가 없다며 돌려주었다.

밴라이프는 주위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똑같은 옆집 주민들과 항상 마주치는 경비 아저씨 그리고 지난 번에도 본 듯한 사람들을 지나치며 살아가기 때문에 동네에 아주 큰 일이 생기거나 가까운 이웃이 이사를 오고가지 않는 이상은 주변 환경에 의해 자신의 감정에 큰 변화를 겪지 않지만 밴라이프는 다르다. 매일 이동을 하며 새로운 정박지에 밴을 주차하고 문을 열어 젖힐 때 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 때 마다 그리고 먹을걸 사기 위해 들른 낯선 동네의 슈퍼마켓에 들어갈 때 마다 우린 마주치는 사람들에 의해 감정에 큰 영향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릴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또는 진심이든 아니든 웃으면서 늘 대하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처럼 대한다. 그리고 우린 그런 사람들 덕분에 기분이 좋아지거나 최소한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아주 간혹 우릴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나 측은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금새 기분이 가라앉는다. 아니 둘 중에 한 명이라도 기분이 가라 앉으면 작은 밴 안에서 그 분위기는 금방 퍼져나가고 상대방으로 옮겨간다.

때문에 우리가 정박지를 찾을 때 부터 아주 사소한 일로 상점에 들어갈 때 까지 주변의 환경을 정말 잘 살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면 우린 주저없이 그 자리를 떴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햄버거 집 주인 덕분에 우린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사진 찍는다고 한껏 신경쓰긴 했지만 행색은 그리 돈 많은 여행객 같아보이지 않는, 매치가 잘 되지 않는 옷들을 겹겹히 껴입은 모습이었는데도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줬으니 말이다.

부다 성

한인마트에서 라면을 몇 개 사들고 밴으로 돌아오니 시간이 꽤나 늦어있었지만 여전히 다뉴브 강 주위에는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에 얼마나 머물지 계획을 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나고 따뜻한 난로도 있으니 며칠 더 있어도 될거 같았다. 비록 강변도로 한복판의 이런 주차장이 돈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이 의아했고 혹시나 우리가 주차비를 결제하는 방법을 모르는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사랑이는 오랜 산책으로 지쳐 잠이 들고 우린 이런저런 얘기들을 도란도란 나누고 있는데 갑작스레 커튼으로 막아 놓은 운전석 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밴이 흔들리는게 느껴졌다. 순간 머릿 속엔 오만가지가 빠르게 지나갔지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주차비를 내지 않아 주차단속요원이 차 바퀴를 결박하는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차 바퀴가 결박되면 그걸 풀기 위해 엄청난 벌금을 내야 할 수도 있겠단 생각에 난 후다닥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우린 안그래도 지금 떠나려던 참이었다고 말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밴에서 내리는 순간 신발이 벗겨져 허리를 숙여 다시 고쳐 신는데 차의 반대편 어둠 속에서 긴 코트를 입은 왠 남자가 점잖게 걸아나와 내 어깨에 손으로 툭 치며 " Sorry"라고 말하고는 차들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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