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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n Jun 07. 2020

욕심을 버리면 넉넉한 밴라이프

#32

처음엔 왜 경유를 넣으면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왜 등유난로에 경유를 넣으면 안 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고 등유와 경유가 왜 다른지 ‘카더라’가 아닌 직접 체험을 해본 사람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등유는 경유에 비해 훨씬 더 깨끗하게 정유가 되어있기 때문에 경유를 태우면 몸에 해로운 물질들이 나온다는 것뿐이었다. 사실 연료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했고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해로운 물질이 정말로 얼마나 어떻게 나오는지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등유 난로에 경유를 넣어서는 안 된다. 등유 난로는 등유가 난로의 심지를 타고 올라가 심지 끝에서 기화되면서 불에 연소된다. 등유는 휘발유나 경유에 비해 휘발성이 훨씬 높기 때문에 심지를 태우지 않고 연소되며 열을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정말 열심히 등유난로에 대해서 리서치를 하고 북미권의 추운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경험 영상들을 끊임없이 연구한 뒤 우린 BP 주유소에서 가장 고급 경유 10리터를 전날 빈의 DIY 매장에서 사둔 제리 캔(보조 연료통)에 꽉 채운 뒤 디젤 엔진 클리너 한 통도 같이 구입했다. 고급 경유는 일반 경유보다 좀 더 깨끗하게 정유를 해서 등유와 비슷한 상태이고 휘발성을 높여주기 위해서 디젤 엔진 클리너를 경유와 함께 일정한 비율로 섞어 난로에 넣으면 등유와 똑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사 박물관 주차장으로 돌아와 다시 밴을 제자리에 주차시키고 나서 고급 경유와 엔진 클리너를 대략 8:2의 비율로 섞어 넣어 불을 붙이니 정말로 등유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매연도 나지 않고 냄새도 없으며 등유와 다름없이 활활 잘 타올랐다. 고급 경유라고 해도 등유의 3분의 1 가격이었고 엔진 클리너 또한 싼 가격으로 어느 주유소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우린 난방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듯했다.

사람들 보느라 정신 팔린 사랑이와 혼이 나가버린 혜아

등유난로의 연료 문제가 얼추 해결된 거 같아 그날 저녁 우린 며칠 뒤 있을 스냅 촬영을 위해 빈의 이곳저곳을 사전 답사할 겸, 크리스마스 마켓도 구경할 겸 밴을 나섰다. 꽤나 성공적으로 주차장에 스며들었는지 아무리 우리가 밴에서 들락날락거려도 누구도 신경 쓰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닫을 때 바깥에서 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면 도난을 당할 위험이 커지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어서 주의를 하는 게 좋다.

어쨌거나 빈은 그냥 정말 큰 도시였다. 분명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들과 구조물들이 즐비했지만 화려한 조명의 크리스마스 마켓들과 그걸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 때문인지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오스트리아 빈에 와 있는지 서울 명동에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태어난 지 5개월이 되어가는 사랑이는 사람만 보면 핥기 위해 달려들려고 했고 평화로운 산책을 상상했던 우리는 뜻하지 않은 사랑이의 지랄까지 더해져 혼이 빠져나간 듯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다니느라 금세 지쳐버렸다.

사실 크리스마스 마켓도 음식이나 기념품을 파는 가판대를 크리스마스 장식품으로 꾸며 높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우린 여전히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싶어서 환장한 사랑이를 겨우 이리저리 끌며 사진이 예쁘게 나올만한 장소들을 찾아 대충 테스트 촬영을 하고 밴으로 돌아왔다.

빈의 크리스마스 마켓 부스 중

스냅 촬영은 우리가 밴라이프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경제활동으로 계획했던 일이었다. 난 사진을 전공했고 10년 넘게 사진 촬영을 해왔으며 영국에서는 졸업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초대전 제의를 받을 만큼 사진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철저히 상업 사진인 스냅 촬영은 나의 이력이나 실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대로 찍고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보정만 해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거였다. 단지 누가 더 홍보를 열심히 해서 유행하는 트렌드에 맞춰서 얼마나 많이 촬영을 해왔는지가 가장 중요한 판매 요인이었고 우리에겐 그런 게 하나도 없었으니 스냅 촬영을 해달라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그래서 밴라이프 초반 스냅 촬영은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크로아티아 민박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와중에 첫 스냅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마침 스플리트에는 경쟁업체도 없었고 우리가 지내던 기간도 신혼여행을 많이 오는 가을이었기에 저렴한 가격으로 촬영을 하고 싶어 하는 신혼부부들의 예약이 제법 들어왔다. 덕분에 스냅 촬영으로 디지털 노마드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촬영 샘플이 쌓이자 심심치 않게 유럽 이곳저곳에서 스냅 촬영 예약이 들어왔다. 그렇게 오스트리아 빈은 우리의 첫 밴라이프 스냅 촬영지였다.


흔히들 회사 그만두고 디지털 노마드로 돈 벌면서 여행이나 하고 싶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풀타임으로 밴에서 살고 여행하며 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상 절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이 아니다. 밴으로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 수가 없으니 항상 어딘가로 이동을 해야하고 집이 곧 자동차라서 사소하게 장을 봐야 할 때에도 집 전체가 움직여야 한다. 때문에 하루 중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나 환경이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일을 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할 수 있는 일의 규모도 작아지고 돈을 많이 벌 수 없다. 물론 어딘가에 집을 빌려 자리 잡고 처박혀서 작업만 한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표도 아니고 그럴 바에야 한국에서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며 결정적으로 적은 돈을 벌어도 욕심을 버리면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힘들고 박봉인 밴라이프 디지털 노마드에 만족했다.

빈의 자연사 박물관 주차장

이런 삶을 사는 우리에게 오스트리아 빈의 물가는 어마무시하게 높았다. 헝가리에서 넉넉하게 장을 봤던 예산으로는 한 끼도 겨우 먹을 정도의 식재료 밖에 살 수 없을 정도여서 우린 정박지 근처의 마트에서 매일 조금씩만 사다가 먹여야만 했다. 정신없는 사전답사를 마치고 밴으로 돌아온 이 날은 허기진 배를 삼겹살 구이로 채우기로 했다.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두툼한 고기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유럽에서 삼겹살은 최고의 저렴한 만찬이었다.

파절이도 만들고 된장찌개도 끓이면서 밥을 짓고 있노라면 차의 앞유리창들은 온도차와 습기로 인해 금세 물방울이 맺힌다. 어설프게 암막 커튼으로 생활공간과 운전석을 나누어 놓다 보니 이중창이 아닌 앞유리창은 한겨울에 숨만 쉬고 있어도 내부에 습기가 차는데 요리를 하고 있으면 발생하는 수증기 때문에 습기를 넘어서 앞유리에 물이 줄줄줄 흘러내린다. 어찌나 많이 흘러내리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차 밑은 온통 고드름이 걸려있고 심지어 차 문은 얼어붙어 열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유럽은 겨울에 해가 상당히 빨리 진다. 한겨울에는 오후 세 네시 정도면 캄캄해질 정도로 해가 짧아져서 상점들도 제법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별 일이 없으면 집에 일찍 들어간다. 우리도 보통 일찌감치 밴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난 뒤엔 앉아서 조용히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거나 아직은 어색한 사랑이와 익숙해지는 놀이를 하곤 했다. 티비도 없고 인터넷 용량도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오롯이 우리 셋의 시간을 보낸다. 물론 공짜 와이파이가 잡히면 밀린 영상을 보거나 SNS를 하느라 정신없지만.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에 왔을 때 즈음 사랑이는 배변 훈련이 한창이었다. 우리가 딱히 뭘 한건 없었지만 민박집에 있을 때에는 베란다에서 배변을 하면서도 가끔 이불 위에서 소변을 본 적이 있어서 밴라이프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밴 안에 세탁기가 없으니 이불 위가 아닌 밖에서만 배변을 하도록 틈만 나면 산책을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은 도심 주차장에 정박을 하고 있으면 자주 밖으로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영하 10도에 가까운 겨울엔 특히나 더 나가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난로 덕분에 밴 안에서는 가볍게 입고 있다가 단지 몇 분의 산책을 위해 옷을 다시 껴입고 밖에 누군가 지나가거나 서있지 않은지 살핀 다음에 나가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무리 춥고 눈바람이 몰아쳐도 열심히 나갔지만 낮에 사람들과 사랑이에게 휩쓸려 다니다가 들어온 날 저녁엔 일 센티미터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혜아와 내가 피곤함과 귀찮음에 무언의 눈빛과 몸짓으로 산책을 떠넘기는 사이 역시나 배변훈련이 완벽하게 되지 않은 사랑이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침대 이불 위에 오줌을 싸버렸다. 5개월도 채 안됐지만 이미 몸무게가 15킬로그램이 넘어가는 사랑이는 이불을 흠뻑 적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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