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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하나, 아빠를 닮지 않은 것-이주민센터 한국어 강사

- 이주민 센터 한국어 강의 봉사 활동

by 강효진

"봉사? 나는 얼마가 됐든 수고비를 주지 않는 일은 할 생각이 없었어."

불교 사단법인에서 운영하는 이주민센터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을 상대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강사로 봉사 활동 하던 때에 대해 물었을 때, 뜻밖에도 아빠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저 일을 하고 싶었고, 적더라도 돈을 벌고자 했을 뿐이라고 했다. 하루에 두 시간씩 일주일에 닷새나 일하러 갈 곳이 있어 좋았고, 시간당 만 원의 강사료가 아빠에게는 참 소중했다고 했다.

아빠에게 고귀한 봉사 정신이라도 그려 넣고 싶었던 걸까. 봉사 활동을 하면서도 돈이 중요했다는 아빠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김이 빠졌다. 이러면 글쓰기 곤란한데.

아빠가 몹시 힘들었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나는 다시 물었다. 생김새도, 문화도, 성별도 다른데다가 우리말도 무척이나 서툰 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느냐고. 다시 한번 실망스럽게도 아빠는 어려울 게 전혀 없었다고 단언했다. 아빠의 강의를 듣던 학생들은 주로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에서 온 여성들이었는데 안정적인 한국 생활을 위해 귀화 시험을 치러야 했고, 그러려면 기본적인 한국어 능력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니 강의를 듣는 이주 여성들은 수업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작고 가녀린 체구에서도 그들의 눈빛만은 또렷하게 반짝거렸다. 예순을 넘은 아빠에게 20대 젊은 여성들은 딸처럼 여겨졌다. 말이 서툰 어린 딸아이를 가르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아빠의 딸 같은 학생들은 수업을 마쳐도 곧장 집으로 가는 법이 없어서, 다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커피를 함께 마시며 정이 들었다.

아빠가 좀 곤란해져야 글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너무 훈훈하기만 한 거 아니야? 속으로만 불평을 하는데, 아빠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일이 더 즐거웠다고. 맞다, 아빠는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했었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아빠 이야기에 시큰둥해졌던 건 내가 영락없이 아빠 딸이라서였는지도 모른다 싶어졌다.


*



내 적성과는 아무 상관 없어보이는 전자 부품 회사가 나의 첫 직장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던 시기가 지나고, 영영 적응하지 못할 것 같던 일들이 그럭저럭 할 만해졌다. 아니 그때가 가장 편하게 일하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별로 관심 없고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내 부족한 능력에 대한 자의식도 없었다. 주어진 것만 수동적으로, 사수에게 배운 대로만 하면 큰 문제 없었고, 그렇게 한 달을 버티면 고맙게도 월급이 나왔다.

그즈음 대학 선배 언니에게서 종종 연락이 왔다. 언니는 막 논술 학원을 차린 참이었다. 한겨울에도 학원이 얼마나 따뜻한지, 학원 근처에 짬뽕집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말하는 언니 목소리가 좋아서 가끔 언니를 만나러 학원에 놀러 가곤 했다. 글쓰기와 논술이라니 (입시는 전혀 다른 분야라는 건 모르고) 문예창작을 전공한 나도 해 볼만한 분야 같았고, 나보다 어린 학생들의 세계라니 (학부모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건 모르고) 과장님과 차장님 눈치를 보는 것보다 수월해 보였다. 아니 뭣도 모르면서 만만하다 생각했다. 어느 날 문득 직장을 그만 두더니 꽃샘추위에 개나리가 움츠러들던 초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언니가 차린 학원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여행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버스를 갈아타가면서 왕복 4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을 감당할, 어울리지도 않는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났던 것일까.

그 용기가 가상하게 일에 금세 재미가 붙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신났고, 하나를 가르치면 둘이나 셋, 혹은 정말로 열을 알아듣는 학생들을 만나면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으면서 내 자식인 양 흐뭇했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었다. 어느새 나에게 수업을 받고싶어 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내 수업을 들으려고 몇 달이고 대기하는 학생들이 생겼다. 내가 정말 대단한 능력자라도 된 것 같았다. 밤 10시가 다 되도록 저녁도 못 먹고 일하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 피곤해도 고달프지는 않았다. 수업을 열심히 하는 만큼 수입도 늘었다. 이거야말로 내게 꼭 맞는 일이었다...

라는 생각은 환상이었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자신의 아이가 내 수업을 들을 수 있을지 조바심을 내던 학부모들은 생각보다 변덕도 심했다. 엄마가 준비했다며 정성껏 포장한 스승의 날 선물을 건네주던 학생이 두어 달 뒤 홀연 사라졌다. 오래도록 예뻐하며 마음을 다해 가르치던 학생이 내 수업에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면, 사교육 시장의 속성을 알면서도 서운했다. 학생이 그만두면 그만큼 수입도 줄어드니 나의 속은 두 배로 쓰렸다.

그즈음 다른 도시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친구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몇 명을 수업료도 받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고. 대학 때부터 늘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학비를 벌고 생활비를 아껴가며 살던 친구가, 졸업 후에도 돈을 더 벌기 위해 가장 악착같이 일하던 바로 그 친구가, 돈도 되지 않는 일을 기꺼이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일지언정 단 한 번도 수업료와 상관없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해본 적이 없었다. 한창 바쁜 지금,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내 말에 친구는 꼭 세 명에게만 도움을 주고 있다고, 그 정도면 괜찮다고 했다. 찻잔을 가만히 쥐고 있던 친구의 손이 클로즈업 화면처럼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작지만 실다워 보이던 손. 잠시 그 손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생각일 뿐. 그때뿐이었다. 친구와 헤어진 후, 나는 본래의 나를 금세 회복했다. 관성이란, 쓰다가 떨어뜨린 연필이나 날마다 타고 다니는 버스뿐만 아니라 생활과 사고 방식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관성에 기대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낸 시간이 23년이었다. 오래 인연을 맺어온 학생들과 학부모님들께 작별인사를 하고 처음으로 출근하지 않는 일주일을 보내는 기분은, 희한했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짧은 짬 동안 쫓기듯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게. 내가 읽기에도 어려운 수능 국어 지문을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무엇보다 내가 그 일을 23년이나 했다는 게 희한했다. 20년을 한결같이 "이 일을 언제쯤 관둘 수 있을까" 노래를 불러댔으면서, 어떻게 23년을 (비록 마지막 몇 년은 과외로 쉬엄쉬엄 일하기는 했지만) 쉬지도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는지가 이상했다.

그렇게 이상한 기분으로 두어 달을 지내다 보니 서서히 보였다. 일을 하느라 마음과 정신의 심한 기복을 겪었던 내가, 사실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변덕스런 기분을 일에 기대며 다스리고 있었다는 걸. 나에게만 지나치게 매몰되어 지친 마음을 일하는 동안 쉬고 있었다는 걸.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기 위해 23년하고도 두어 달의 노동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나를 아는 데에도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



일하는 데에 돈이 참 중요했다는 것도,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다는 것도, 심지어 수업을 할 때면 의욕이 넘쳐서 목소리가 강의실 밖까지 쩌렁쩌렁 울린다는 것까지도, 아빠와 나는 닮은 구석이 많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다만 한 가지 닮지 않은 게 있었다. 스스로 무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고 살았던 나와는 달리, 아빠는 어릴 때부터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빠가 오래 전 꿈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건,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친구가 K- 팝 때문인지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였다. 심지어 중국이나 캄보디아 같은 곳에서도 한국어 강사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말에 아빠는 신이 났을까. 건설 시행사에서 일하면서 퇴근 후에는 가까운 교육기관으로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따기 위한 야간 강의를 들으러 다니며 공부했다. 건설 시행사를 퇴사한 후에는 한국어 강의를 할 수 있는 곳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아빠가 일했던 이주민센터였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아빠에게는 모난 곳 없이 따뜻하게 기억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아빠는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선생님의 꿈을 이주민센터 조그만 강의실에서 이룬 것이었다. 이국에서 온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인 앞에서 예순셋의 아빠가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그 미소는 영락없이,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열아홉 청년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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