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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이력서를 열었다

파일명 '이력서 – 19.8.12'

by 강효진


날마다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력서 – 19.8.12'라고 이름 붙은 한글 파일을. 이 파일을 열면 눈이 마주칠 텐데, 난 그 눈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문득 책상 주변에 뽀얗게 쌓인 먼지가 보였다. 읽지도 않는 책은 왜 이렇게 잔뜩 빼놓은 거야. 급한 일이 생긴 것처럼 책상 정리를 하고 걸레질을 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조용히 노트북을 껐다. 어쩐지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오늘은 꼭 열어서 제대로 봐야지, 마음을 먹지만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 파일을 받고서 생각 없이 열었다가 화들짝 놀라 황급히 파일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거기엔 나를 보는 눈이 있었다.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 그 눈은 나에게 묻고 있었다.

이제 왔니?


아빠가 퇴직 이후에 해 왔던 일들에 대한 글을 써 보고 싶다고 처음 말했을 때, 아빠는 대번에 반색을 보였다. 안 그래도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써서 그간의 일들을 정리해 보고 싶었는데, 그걸 내가 해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은 썰물처럼 뒤로 물러나 버렸다. 내가 쓰려는 것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었으니까.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전전하던 상황이 담길 텐데 괜찮겠느냐고 으르듯 묻는 내 말에, 아빠는 무슨 상관이냐고 했다. 아빠 지인들 중에 그걸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그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아빠에 대한 글을 쓸 자신이 없었던 거다.

몇 달을 고민만 하다가 용기를 내어 전화 인터뷰를 시작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꺼냈을 때는 오히려 아빠가 한발 물러났다. 아빠에게 일이 생겼으니 인터뷰는 좀 나중에 해도 되겠느냐고 했다. 처음의 적극적이었던 아빠만 생각했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며칠 후 아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는 삶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남에게 알릴만한 것도 없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단다."


막상 당신의 인생에서 들려줄 만한 대단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아빠는 뒤로 물러났던 거였다. 이제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라, 내가 쓰고자 하는 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간의 경험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빠는 말했다. 아빠의 목소리는 나를 향해 한결 기울어져 있었다. 이제껏 그래왔듯, 나를 위해서 당신 이야기를 해 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얼마 후 아빠에게서 메일이 왔다. 아빠가 은퇴 후 해온 일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복잡하기만 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사정이 생겨 중단되어도 상관없으니 글을 쓰는 일에 부담 갖지 말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면서 파일 두 개를 달려 보내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력서 – 19.8.12'라고 이름 붙은 아빠의 이력서였다.

아빠에게서 메일을 받은 지 열흘이 넘도록 나는 이력서를 피해 다녔다. 제대로 열지도 못하는 이력서가 마음 속에 바윗덩어리처럼 매달려 있었다. 밥을 먹어도, 책을 읽어도, 바윗덩어리는 명치께에서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저 클릭 한번 하면 될 일을 왜 이렇게 망설이기만 하나 싶으면서도, 막상 노트북 앞에 앉으면 파일 제목만 쳐다보다가 결국 외면하고 말았다. 도저히 그걸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책상 청소도 끝내고, 밥도 먹고, 커피까지도 마시고 난 어느 늦은 아침,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제 더는 도망만 칠 수가 없었다. 마음 속 바윗덩어리의 실체를 내 눈으로 보아야만 했다. 내가 가진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이력서 – 19.8.12' 파일을 클릭했다.

나를 건너다 보는 눈을 피해 아빠의 이름 석 자부터 읽었다. 그 옆엔 생년월일이 적혀 있고, 괄호 속에는 ‘만 72세’라고 당시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었다. 1960년 초등학교 졸업으로 시작된 이력은 2016년 '아주파크 경주 농협 성동점(현)'으로 적힌 주차장 관리 업무까지 이어졌다. 그게 다가 아니다. 공무원 시절 받았던 몇 개의 유공 표창과 여덟 개의 자격증까지, 이런 것까지 적을 필요가 있나 싶도록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이제 얼굴을 볼 차례였다. 나를 보는 아빠와 눈을 맞췄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작성한 이력서 속에는 지금보다 젊어보이는 아빠 얼굴이 있다. 그렇지만 이력서에 붙이기에는, 역시 너무나도 나이 든 얼굴이다. 내가 기억하는 자신만만했던 얼굴은 이마와 미간, 그리고 눈가의 주름 뒤에 가려졌다. 숱이 많이 줄어든 머리카락은 까맣게 염색을 했다. 사진 속에서 아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는데, 웃고 있다고 하기엔 조금 애매해 보인다.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빠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져갔다. 올라간 입꼬리는 점점 내려와 무표정에 가까워지고 눈은 더욱 작아졌다. 증명사진 용으로 적당해 보이던 온화했던 얼굴은 무언가를 견디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내가 그 동안 아빠에게 굳이 묻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목격하게 되고 말 거라는 암시였다. 더는 피할 구석이 없었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린다. 이제껏 내가 외면해 왔던 아빠의 노동 이력서를 정면으로 읽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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