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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달과 풀 Apr 26. 2024

한 시간을 벌고...

지난 밤 창밖 보름달이 자꾸만 나를 깨웠다.

깜깜한 산위에 천연덕스레 커다란 얼굴로 나를 자꾸만 들여다보니 잠결에 그 눈길이 신경쓰여 잠을 깨길 반복했다.

한참을 자다가 눈을 떠보면 보름달이 컴컴한 산꼭데기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고, 한참을 자다가 눈을 떠보면 또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래서 덕분에 외롭지 않았는데 밤잠은 많이도 설쳤다.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밤새 나를 지켜보던 달은 어디 가고 없고 고운 연두빛에서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산이 눈에 그득히 찬다.

이쁘다.  싱그럽다.

그래 오늘은 산길을 넘어서 출근을 해야지!

지난날 먹다만 볶음밥 냄비에 불을 약하게 켜놓고 세수를 하고 찌뿌두둥한 얼굴을 탁탁 때려가며 세수를 하고 화장품을 듬뿍 발랐다.  아직 낫지 않은 감기때문에 시야는 선명하지 않으나 안경을 쓰기는 싫다.

옷장 이곳 저곳을 뒤져가며 폭넓은 까만 바지를 꺼내입고 지인인 한국화가가 그린 티셔츠를 위에 입었다. 끈으로 허리를 묶으려다가 가죽허리띠를 둘렀다.

부엌에 냄비밥에서 탄 냄새가 난다.  몇 숟갈을 먹고 남은 밥을 씽크대에 내려놓았다. 아침밥은 그렇게 대충 먹고 일곱시가 되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그렇게 하루의 아침을 일찍 시작하면서 나는 한 시간을 벌었다.

오랜만에 산길을 오르니 산이 많이도 변해있었다.  올 해 초에는 눈이 쌓여있기도 했고, 안개가 자욱한 날도 있었는데 이젠 그야말로 온통 연두빛깔과 초록빛깔이다.  그 초록을 눈에 그득 담고 싶은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선명하지 않다.  피로가 계속 몸에 쌓여있으면 눈이 맑지 않다.  그 맑은 초록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없다.  그저 초록이 그득하구나!

산길에는 초록 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초록 벌레가 나뭇가지에서 거미줄같은 줄을 타고 내려와 데롱데롱 매달려서 바람에 이리 저리 그네를 타고 있다.

좀처럼 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저 그 초록 애벌레가 내 몸에 닫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무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자판기를 두드리는 내 왼쪽 엄지손가락 위에 회색 자벌레가 꼬물거리며 짧은 내 손가락 길이를 재고 있다.

이런~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자벌레를 밖으로 보내줬다.

아침 바람이 조금 서늘하다.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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