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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신쥬디 Mar 01. 2024

이거 카스트 제도 아니야?

크루즈 5일 차, 동양인으로서 불편한 사실들

2015/5/3 일요일 밤 (크루즈 탑승 5일째)


크루즈에서 소위 말하는 "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출신 동남아시안이다. 웨이터, 청소부, 룸서비스부터 배 지하에서 3D job 하는 사람들까지, 동남아시안 직원들이 정말 정말 많다. 나도 crew고 그들도 crew인데, crew의 "급"이 달라서 그들이 내 방 청소까지 매일 해준다. (후에 내 화장실 변기 물이 넘쳐서 난리가 났는데 그 또한 말끔히 청소해 줬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 공개)

반면 항해사, 엔지니어, 사무직, 나처럼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99% 서양계 외국인이다.


지난 일기에 언급했던 승무원들(crew)의 "레벨 시스템"에서 동남아시아인들은 죄다 하급(...ㅜㅜ)이어서.... 뷔페에서 식사를 못하는 건 당연하고, 주거환경에도 차이가 있고, 근무량도 많고, 나를 포함한 다양한 승무원들이 가는 Officer's Bar에도 출입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그들끼리만 지내고 우리랑은 말 섞을 일도 없다.

미국 달러로 페이를 받으니 적은 돈도 그들의 모국에선 큰돈이겠지. 미국 회사는 그걸 이용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노동을 얻어내겠지. 제도는 인종차별이 아니고 직업 구분(이라고 하는 것도 웃김..)이라고 하지만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처럼 되어버린 게 불편하다. 이거 카스트 제도랑 별 다를 게 없는 거 같은데?


크루즈 회사가 네덜란드 소속이라 그런지 선장과 “위 계급” 직원들은 죄다 유러피안이다. 북유럽 사람들 특성상 체격도 큰데 제복까지 차려입으니, 원래도 왜소한 체구에 칙칙한 유니폼을 입은 동남아 크루들과 외적으로도 엄청 비교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불편하다. 이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급과 차별이 쉽게 없어지지 않을 거 같아서 더더욱.

그리고 한 단계 더 속상한 건, 이렇게 "하급" 일을 하는 걸 dream job으로 여기는 동남아시아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엔 너무나 안타까워 보이는 일인데, 그들은 그 직업을 갖기 위해 열심히 교육을 받고 "꿈"을 이룬다.


넘치게 먹고 마시는 백인 승객들, 배의 중요한 임무를 맡은 백인 오피서들, 칙칙한 지하실같은 A Deck에서 생활하는 동남아시아인들을 그려봤다.


승객은 99% 백인 노인들이다. (2023년 시점에선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왕 대접받는 승객들은 당연히 부자들일 거다.

아마 꽉 막힌 인종차별자들도 많을 거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들에게 굽신굽신 하며 서비스하는 사람들은 죄다 까무잡잡한 사람들이니...

굉장히 까칠하고 대접받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도 많다. 물론 친절하고 잘 웃어주는 분들도 많고.


솔직히 미국에 살면서 내가 인종차별을 당한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다. 좋게 좋게 생각하고 넘기는 성향 때문인지, 내가 둔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인종(직업)에 따라 사람들이 “구분” 되는 걸 보니 다소 충격적이다.

크루즈에선 동양인들만 "하급" 일을 하고 하대 받는 게 기분 나쁘다. 내가 동양인이 아니었다면 이걸 어떻게 바라봤을까? 서양인들은 이 시스템이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반대로, 호화를 누리는 승객들과 "고급"직원으로서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전부다 유색인종이고, 백인들은 배 아랫칸, 차별된 환경에서 제한된 권리를 가지고 "하급"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질까?



배 탄지 5일째다.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나를 잘 알아본다. 진짜 깜놀. 나는 얘기해 본 기억도 없는데 나를 알아!.. 특히 동남아시아인 직원들이 유난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 - 길치에 안면 인식 능력도 떨어지는 나는, 길 찾는답시고 똑같은 곳을 뱅글뱅글 도는 일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럼 한 곳에 서있던 사람들은 나를 여러 번 본거지.. 이제 복도에 멀뚱멀뚱 있으면 직원들이 어디 찾냐고 묻는다ㅋ.. 도와줘도 얼굴 기억 못 하겠지만 계속 좀 도와줘요ㅠ.ㅠ

아직도 길을 헤매긴 하지만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어젯밤에 대화 나눴던 내 또래 여자애들은 자기들 첫째 주에 매일 울었던 얘기를 해주며 나보고 잘 지내는 게 대단하다고 궁디팡팡 해줬다.ㅋㅋ

뭐... 못 지낼 이유가 딱히 없다... 음악 하는 것도 재미있고~ 또래 친구가 많은 건 아니지만 같이 밥 먹고 수다 떨 사람들은 있으니 말이다.

바다 바라보면서 '아 누구 보고 싶어 훌쩍훌쩍ㅠㅠ'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꿈에 친구들이 나오는 걸 보면 마음 한구석에 그리움이 꽁하고 있나 보다.ㅋㅋ


비좁은 방에 있을 때만 좀 답답하지 하루종일 진짜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끼며 항해하고 있다.

감사함과 동시에 내가 이걸 deserve 하는지도 묻는다.


옛날 일기에 나는 시냇물처럼 졸졸졸 흐르는 삶을 사는 것 같다고 쓴 적이 있다. 딱히 내 의지 없이 좋던 나쁘던 그저 흘러가는 대로 주어진 것에 날 맞춰가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시냇물이 결국 바다까지 와버렸네!!

ㅋㅋㅋ


어쨌든 바다에 사는 거 걱정해 주시는 분들 많은 거 알기 때문에 잘 지낸다고 널리 널리 알려드리고 싶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으니 이제부터는 대서양이 아닌 태평양을 항해한다. 아직 땅은 한 번도 안 밟았으며 내일모레 코스타리카에 잠시 내려서 구경할 예정이다.

아직 5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모든 게 익숙한 기분이라 시간이 더 지나면 재미없고 슬럼프가 올 수도 있겠지만 그때도 졸졸졸 시냇물처럼 잘 지나가리라~~~


아 그리고 친해진 애들이 나는 good girl이라고 토닥토닥해 줬다. 외국애들이랑 놀면 나는 왜 애 취급받는 거지..? 어려봐짜 몇 살 차이도 안 나는구먼 -.-

단순히 키가 쪼꼬매서 그런가..

굿걸이라고 봐주니 고맙긴 하다. 다들 굿피플로 전염시킬 테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해요. 계속 크루즈 소식 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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