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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Jun 11. 2021

멋쟁이 바지의 메카, 아버님 세탁소


우리 시아버님의 아침은 새벽 4시쯤 시작된다.
(때론 네시 반쯤)
미라클 모닝을 위해
애써서 만들어낸 새벽 기상이 아닌,
연세가 드셔서 새벽잠이 줄어든
어쩌다 보니 미라클 모닝이다.


까만 새벽에 하루를 시작하시는 아버님은
먼저 거실에 불을 밝히시고
조간신문을 한 면 한 면 읽어내신다.
그렇게 지면으로 세상을 만나시고
해님이 살짝 고개를 내밀면
‘아버님 세탁소’ 영업을 시작하신다.


'아버님 세탁소'는
영업 허가증이 따로 없는
휘뚜루마뚜루 스타일의
아버님이 사장, 아버님이 직원이신 세탁소다.
매일 새벽 5-6시쯤 문을 열어
오전 7시면 마감을 하신다.
단골이자 유일한 손님은 우리 네 식구.


튼튼한 다림판과, 다리미, 그리고 깨끗한 천 한 장이면
아버님 세탁소는 원활하게 운영이 된다.
한 번은 깨끗한 천이 없어서
세탁소에 위기경보가 울린 적이 있을 정도로
세 아이템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에비(남편)의 양복과 셔츠, 손수건,
에미(나)의 바지와 블라우스,
장군님들(두 아이)의 남방이
아버님 세탁소의 주요 일감들이다.


아버님이 아들네에 도착하시고 맞는 첫날 저녁이면
아버님 세탁소 사장님의 요청에 따라
집안에 있는 모든 다림질할 옷들을
거실 한편으로 모은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 때문에
다림질해야 할 옷들을 꽁기꽁기 숨겨놨드랬다.
아버님에게 너무 많은 일감을 드리는 게 송구해서
최소한의 '에비(남편) 정장'만 건네드리곤 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선
새벽에 할 일이 너무 없으셔서
다림질을 아껴서 나눠서 하셨다고 하시며
더 다릴 것이 없냐고 매일 아침 묻곤 하셨다.
"다림질할 것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하시는 아버님 덕분에 숨 막히는 옷장에서
옷들이 하나 둘 광명을 찾았다.
어느새 아버님 세탁소의 단골손님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아버님 세탁소에 옷을 맡겨드리고 보니
재미난 일이 벌어진다.
40년대생 아버님이 사장님이시고
40년대생 아버님이 직원이신 세탁소이다 보니
다림질 스타일이 시대와 공간의 선을 훌쩍 넘어버렸다.


아버님은
모든 바지를 같은 모양으로 다려주셨다.
일명 멋쟁이 모양.


처음 다림질받은 바지를 받아 들고
선뜻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아... 이건 안 다려도 되는 바진데....'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청바지도,
하얀색 면바지도,
펑퍼짐한 배기바지도
모두 바지통의 한가운데에 정확히 각을 넣어
칼 다림질을 해 주셨다.
한 벌도 빠짐없이
칼날이 세워진 멋쟁이 바지로 만들어 주셨다.


그날 아침에 입고 나가려던 청바지는
말없이 고이 접어 옷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가 아무리 수더분한 애기 엄마라지만,
차마...
각 잡힌 청바지는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실리가 없는 아버님은
농담 3종 세트에 시동을 걸기 시작하셨다.

1)"에미야~ 내가 오늘 다림질은 한 장당 백 원만 받을게."
2)"이삭이, 요한이 옷은 서비스야."
3)"카드 결제는 안된다 에미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집에 가시는 날 정확하게 입금해 드릴게요 아버님."

'아 모르겠다!'
웃으며 같이 농담의 파도에 올라탔다.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 기분이 나아진다.


입고 싶었던 청바지를 당장 입을 수는 없지만,
우리 식구들의 옷을 한 땀 한 땀 다려주신
아버님의 사랑 촘촘히 박힌 그 마음이 전해져서
박하사탕을 입에 머금은 것 마냥
감사가 활짝 번지기 시작한다.


아버님이 행복하시고 내가 행복한데,
가끔 70-80 멋쟁이 바지 좀 입으면 어떤가!
아버님의 사랑 마법에 퐁당 빠져들어
또 기승전'감사'다.


아직도 난 가끔
아버님의 땀과 정성이 각인된
각 잡힌 청바지를 주워 입는다.
아버님 덕분에 개성 있는 아주미가 되기도 하고,
때론 잘 다려진 바지 덕에
깔끔한 아주미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 모든 '추억'이 아버님이 계시기에
겪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호사임을 되새겨본다.
8년 간 단 한 번도 아버님 세탁소에
세탁비를 정상 결제한 적은 없지만,
단 한 번의 파업도 없이
매번 같은 스타일과 같은 정성으로
영업을 이어가시는 아버님이 계셔서
참 참 참~좋다 나는.


이전 07화 시아버님과 나. 장 트라볼타 챙기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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