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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May 17. 2021

에미야, 바쁜데 내가 전화했니?


지난 주말, 외국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시아버님이시다.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하게 물어보신다.
“에미야, 내가 바쁜데 전화했니?”
“아니요 아버님 하나도 안 바빠요.”

그렇게 대화는 시작된다.
“에미야. 울산에 코로나 확진자가 너무 많이 나와~
어떻게 해서든 조심해야 한다.
너희들 교회 가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해 봐라, 며늘.
애들도 다 괜찮지?”
“네 아버님, 저희는 건강해요. 걱정 마세요.
말씀하신 대로 조심조심 또 조심하며 지낼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러고 나서 다음날 교회로 향합니다.ㅎㅎ;;)
“그래 그러면 됐다. 잘 보내라.”
딸깍.


그리고 또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전화가 울린다.
“에미야, 내가 바쁜데 전화했니?”
“아니요, 당연히 안 바쁘죠!”

신문을 보시다 보니 행주를 깨끗하게 삶는 법이
소개되었다고 받아적으라시며
하나하나 번호를 붙이시며 방법을 알려주신다.
(한번쯤은 해 봅니다. 그러고 나서 또 까먹습니다.)


또 어느 날은,
“에미야, 내가 바쁜데 전화했니?”
“아뇨 괜찮아요 아버님.”

“내가 가만히 누워서 생각해보니, 요한이는(작은아이) 브로콜리를 조금 더 잘게 잘라서 줘야겠더라.
요전에 갔을 때, 애가 브로콜리를 씹는데
시간이 한참 걸리더라구.
에미가 연구 좀 해봐.”
“아, 그렇구나요 아버님. 연구해 보겠습니다.”
(이런 건 순종! 브로콜리 크기가 점점 작아집니다. 작은 꼬마의 항의가 빗발칩니다. “엄마 제꺼는 왜 작아요?”)
“그래 그러면 됐다.”
딸깍.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아이들 한창 등교/등원 준비를 시키는 아침)
“에미야, 내가 바쁜 시간에 전화했지?”
“괜찮아요 아버님, 대충 준비 다 했어요.”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말이야.
애들 아랫도리는 내복 입히지 말고 보내.
사내놈들은 아랫도리를 시원하게 해 줘야 해.
지난번에 이삭이 보니까 땀 흘리던데,
위에도 얇은 내복 하나만 입히고,
아래에는 내복 없이 바지 입혀서 보내봐.
하나도 안 추워.”
“아, 네에 아버님.
오늘은 마침 바지 속에는 내복 안 입혔어요. 호호호.
명심할게요.”
(웃통은 두꺼운 내복을 그대로 입혀 보냅니다...ㅎㅎ)


그리고 이런 날도 있다.
“에미야, 바쁘지? 너 통화 괜찮니?”
“당연히 괜찮죠.”
“에미야, 내가 가만 생각해 봤는데,
에비가 반찬 먹는 양을 좀 줄여야겠더라.
밥 한 끼에 반찬통 하나를 다 비우는 걸 봤는데,
그러면 짜서 안돼. 에비도 건강관리해야지.
에미가 잘 좀 이야기해서 반찬 양을 좀 줄여보도록 해봐.”
“네, 오늘 저녁부터 한번 해 볼게요.
그런데, 이삭 아빠가 입이 그렇게 단가 봐요.
너무 맛있게 먹어서.... 덜 먹으라 하기가 어려워요.
일단 제가 반찬을 더 적게 꺼내 볼게요.”
(그날 저녁 반찬을 덜 꺼내보지만, 그는 리필에 리리필을 해서 먹습니다. 입이 달아요. 한창 클 때라....;;)
“그래 에미가 어떻게든 그런 건 신경 써야 해.
그래, 고맙다. 잘 보내라.”
딸깍.


“에미야, 바쁜데 전화한 거 아니니?”
“아뇨 괜찮아요 아버님.
저도 전화하려고 했었어요.ㅎㅎㅎ”

“에미야 너희 김치 안 떨어졌니?
내가 지난번에 김치 냉장고 정리할 때 보니까
너희 집 김치가 얼마 안 남았던데.
누워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
“아, 김치 조금 남아 있어요 아버님.”
“아직 남아있어? 왜 그렇게 김치를 안 먹었어?
부지런히 먹어, 김치만큼 좋은 게 어딨다고.
김치 다 먹으면 바로 전화해 에미야!
우체국 가서 보낼게.”
“네 꼭 그럴게요 아버님.”
(습관처럼 그날 저녁도 깜빡하고 김치를 꺼내지 않습니다..;;;)
“그래 많이씩 먹어 에미야. 끊는다.”
딸깍.


아버님께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바쁘게 전화를 거셔서는
용건만 간단히 하시고 딸깍! 끊으신다.


아버님의 전화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고분고분 며느리 모드로 모드 변경도 하기 전에
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남편 몸무게 이야길 왜 아들 대신 며느리에게 하시는 거지?’
그리고 또 어떨 땐,
‘살림까지 전화로 코칭하시는 건, 좀...ㅠㅠ’
하며 마음속의 하이에나가 소환되어
마음속을 으르렁거림으로 채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참 다행인 것은,
불평으로 얼룩졌던 마음도
‘아버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금세 사그라들게 되었다.
아버님의 유별난 전화도
내가 우리 아이들을 떠올리며 하는
사랑 담긴 걱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아이가 오늘 물통을 안 가져갔는데,
얘가 하루 종일 물을 못 마시면 어쩌지?’
‘아이들 잠자는 시간이 늦어졌는데,
애들이 피곤해서 어쩌지?’
괜한 걱정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아버님의 특별한 사랑에 익숙해지는 중이다.
아버님이 이렇게 전화를 걸어주실 수 있다는 것은
아버님이 여전히 정정하시고,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는
열정과 감성을 품고 계시다는 증거이기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드는 전화마저도 반갑고 감사하다.


혹여나 우리가
더 이상 이 지구 상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없는 날이 다가올까 봐
가끔은 아버님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먼저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님, 바쁘신데 제가 전화 걸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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