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이들,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는 법.
세 아이를 키우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아이들을 위로해야 할 일이 생긴다. 아이들이 더 어릴 때는 넘어지거나 장난감을 빼앗겼거나 하는 등의 비교적 단순한 상황에 대한 위로를 건네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첫째와 둘째가 조금 더 자란 지금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위로의 기술이 필요하다.
얼마 전의 일이다.
둘째 아이의 피아노 학원 하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갔다. 셋째를 유모차에 태워 1층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제나 우리 둘째가 계단을 뛰어 내려와 활짝 웃으며 엄마와 동생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러곤 유치원에서 만들어온 온갖 작품들을 꺼내서 길가에 서서 작품 설명회까지 열고 나서야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선생님의 손을 잡고 내려온 둘째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고, 선생님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어머니, 오늘 요한이가 울었어요. 처음으로 조금 어려운 양손 건반 치기를 배웠는데, 생각처럼 잘 안되던지 요한이가 속상해하며 울더라고요."
"에구 그랬군요.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제가 요한이 이야기 들어주고 잘 위로할게요."
"네 어머니. 그래도 요한이가 욕심이 있어서 그런 거니 발전 가능성이 있어요. 요한이 칭찬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피아노 학원 등록 5개월 차, 우리 둘째에게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다. 좋아하는 붕어빵은 사준대도, 호떡을 사준대도, 편의점을 가자해도 대답 없이 눈물만 뚝뚝 떨군다. 아이를 꼭 안아주며 토닥였다. 그날따라 비는 또 얼마나 오는지, 유모차의 바람막이도 엉망으로 젖고 둘째와 나도 흠뻑 젖어 아이의 눈물과 빗물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다. 그리고 아이에겐 응원군이 필요했다.
흐느끼며 우는 아이를 살살 달래서 아이가 좋아하는 버블티카페로 향했다. 아이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평소에는 아이가 가자고 해도 버블티는 설탕이 잔뜩 들어가서 안된다며 발길을 돌리곤 했던 곳이다. 하지만 위로에는 당충전이 필수 아닌가. 우선은 쏟아지는 비를 막을 지붕이 필요했기에 둘째의 손과 유모차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나머지 한 손은 아슬아슬하게 우산을 잡고 버블티 카페로 들어섰다. 둘째에게는 메뉴판을 보고 원하는 버블티를 고르도록 시키고, 먼저 집에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는 첫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급회의가 있으니 버블티 가게로 오라고.
둘째는 한참을 고민해 최적의 메뉴를 골랐고, 첫째는 오자마자 단번에 메뉴를 골라 주문했다. 엄마와 아들, 또 아들, 그리고 딸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비가 와서 날이 많이 추워졌지만 아이들은 차디찬 버블티를 호로록거리며 맛있게도 마시는 중이었고, 둘째는 피아노 학원에서의 아픔은 잊은 지 오래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목적은 '위로와 격려'였으니 목적달성을 위해 대화를 시작했다.
"요한아, 오늘 피아노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어쩜 이렇게 빠르게 표정 변화가 가능한 건지 궁금할 정도로 아이는 금세 미소를 거두었다.
"오늘 양손 치기로 연주하는데 내가 생각했던 대로 잘 안되고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속상했어요."
"아이고 그랬구나, 속상했겠네. 그래도 어려운 걸 배웠다는 건 요한이가 실력이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아. 오히려 축하할 일 같은데?"
"아니에요. 저는 양손 치기 잘 못해요."
아이는 여전히 풀이 죽어 있었고 나는 재빨리 첫째와 눈빛을 교환했다.
첫째 형의 등판이다. 이럴 땐 형님의 라떼만한 위로가 없다.
"요한아. 너 뭐 쳤어? 벌써 징글벨 쳤어? 형아도 일곱 살 때 피아노 다닐 때 엄청 어려웠어. 그런데, 계속하니까 잘 되더라. 요한이도 잠깐만 어렵고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형아는 피아노 오래 다니지도 않고 그만뒀는데, 너는 벌써 5개월이나 다녔잖아. 네가 사실은 더 대단한 거야."
우리 집 장남은 미리 대사를 준비라도 한 듯 속사포처럼 위로와 격려의 말을 쏟아냈다.
"형아도 양손 치기 배웠어? 나는 너무 못해."
그제야 둘째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배웠지. 근데 진짜로 책에다가 사과 그림 그리면서 연습하면 잘하게 된다니까.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건데, 연습하면 진짜 된다니까."
형의 격려는 2절까지 준비되어 있었고, 덕분에 둘째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야? 그래도 나는 내일 피아노 가기 싫은데...."
이제는 내가 마무리 투수의 역할을 할 할 차례.
"요한아 힘들 때 가야지 진짜 실력이 느는 거야. 내일 가보면 훨씬 쉽게 느껴질걸? 엄마가 오늘 요한이 힘내라고 버블티 사준 거야. 요한이 덕분에 우리 사총사가 다 같이 모여서 버블티도 마시고 긴급회의도 이렇게 했잖아. 고마워 요한아. 그리고 힘내 우리 짹짹이!"
아이는 그제야 다시 얼굴 전체를 두르는 미소를 띤다.
이번 위로모임은 성공이다.
아이들을 위로하다 보면 나의 마음도 종종 무너져 내린다. 아이가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속상할지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은 타닥타닥 타들어간다. 그럼에도 아이들 앞에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공감은 하되 같이 슬퍼지거나 아파지지는 말기, 그리고 아이가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를 만들어주기.
초등 4학년 생과 일곱 살 어린이, 그리고 이제 막 첫돌이 지난 꼬마아가씨를 키우다 보니 아이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요령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다. 아이들 덕분에 이렇게 삶의 지혜가 늘어나니 감사할 일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좋은 위로자이며 격려자이다. 동생이 슬프거나 형이 슬플 때, 그리고 막냇동생이 콩 하고 부딪혀 아파할 때, 그리고 엄마에게 에너지가 필요할 때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씩 알아간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며 서로 맞추어 살아가듯 우리는 독수리 오형제처럼 다섯 명이 한집에서 복닥복닥 살아가며 그 속에서 작은 사회를 경험하고 배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고 가장 좋은 제자가 되어준다.
오늘도 둘째와 셋째는 눈물을 쏟았고, 나머지 네 사람은 조언과 위로와 격려, 그리고 엉뚱한 개그까지 골고루 제공하며 괜찮아지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서로가 서로 덕분에 삶의 지혜를 한 단계 더 레벨업 할 할 수 있는 기회를 또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