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둥이 맘이 아이를 잘 키워야 하는 이유.
육아가 다 그렇듯 삼둥이 육아도 매일매일이 전쟁이고 파티고 엉망이며 축복이다.
아이 셋을 키운 다는 것은 큰 틀에서 틀림없이 축복이지만, 사람 생각이라는 것이 늘 일관될 수는 없는 법.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야 하는 건지 삶을 원망도 했다가,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 엄마일까 하며 반성도 했다가, 도대체 너희는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며 분위기 파악 못하고 날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미운 마음도 잔뜩 품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며 사는 중이다. 평범한 인내심과 평범한 마음밭을 보유한 엄마인 내가 아이 셋을 키운다는 것이 이만큼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잘 견디고 충분히 즐기며 아이들을 잘 키워내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삶을 영위하는 중에 그 이유를 종종 만나곤 한다.
얼마 전의 일이다.
둘째와 셋째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 도서관을 향하고 있었다. 왼쪽 손은 둘째 아이 손을 잡고 오른손은 셋째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오르던 그 길은 신축 빌라가 많은 길이었다. 대학가라 학생들도 많이 살고 있었고, 외국인 학생이나 어르신 분들도 많이 사는 동네였다. 둘째와 한참을 떠들며 길을 오르고 있는데 아래로 내려오던 할아버지 한분과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유모차에 어리둥절하게 앉아있던 막내를 보며 활짝 웃으시며 "아이고야, 아이고 예뻐라. 아이고 예뻐." 하셨고, 가만히 서서 할아버지를 관찰하고 있던 둘째를 보고 "아이고 예쁘다. 어쩜 이리 예쁘노. 아줌마 참 잘~했다. 우째 이렇게 예쁘노 아야들이." 하시며 초면에 내 옷자락을 살살 치셨다. 그 순간 '영감님 선 넘으셨네.'가 아니라 우리 시아버님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시는지 잘 알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시아버님 보다도 훨씬 더 연세가 많아 보이셨다. 누가 물어봤을 때, 설명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호호 할아버지'라는 말로 모든 설명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아 보이셨다. 키는 우뚝 큰 데다 마른 체구에 어깨와 허리가 구부정하게 굳은 채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아이들이 예쁘다고 하시니 나로선 그저 감사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도 "감사합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둘째 아이의 뒤통수도 살짝 밀어 누르며 감사 인사를 시켰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헤어져 아래로 내려가시면서도 "아이고오 예쁘다, 예뻐." 하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그리고 나는 대뜸 둘째 아이에게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너희가 너무 예쁘신가 봐, 근데 할아버지가 엄마한테 아줌마라고 하셨는데 엄마 진짜 아줌마 같아 보여?" 그러자 아이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엄마 아줌마 같지 않아요. 며느리 같아요." 며느리라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길가에 서서 한참을 웃었는데,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예의 그 할아버지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셨다. "어여, 아줌마요. 어여!" "네에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할아버지는 엉거주춤 우리를 향해 걸어 올라오고 계셨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혼자 올라오시게 둘 수가 없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할아버지와 다시 마주했다. "어여, 아줌마. 아가야들이 너무 예쁘다. 자자 아가야 받아라." 하며 호주머니에서 꺼낸 천 원짜리 뭉치를 우리 둘째에게 건네셨다. "아니 안 주셔도 되는데, 아니 이걸 어떻게..." 하며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아이들 맛있는 걸 사주라고 하시며 급하게 온 길을 되돌아가셨다. 나는 또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잘 키워 보겠습니다.(?)" 순식간에 나도 생각지 못했던 말이 쏟아져 나와버렸다.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잘 키우는 일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길 가는 아이들을 예뻐하며 쌈짓돈을 꺼내 주는 상황까지 벌어지는 것을 보니 요즘 참 아이들이 귀해졌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출산율이 저조해서인지 아니면 어린 아기들이 집밖으로 잘 나서지 않아서 그런 건지 요즘 막내를 데리고 외출을 하면 어른들은 요즘 아기 보기 너무 힘들다고, 너무 예쁘다며 다들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심지어 아이 셋을 모두 데리고 출동한 날에는 종종 행인이 지나가다가도 다시 돌아와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는 묻는다. "어머나, 애가 셋이에요? 애국자네 애국자. 너무 예쁘다. 너무 잘했네요." 이런 말을 듣고 나면 아이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 덕분에 가만히 있다가 온갖 칭찬을 받고 멋지고 좋은 사람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칭찬을 받은 것이 기분 좋고 뿌듯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이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아이들인지를 타인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 짧은 순간들이 모여 다시 한번 육아에 온기를 불어넣고 열정을 불어넣는다.
아이를 셋 쯤 키우다 보면 아이들의 천방지축도 온몸으로 겪지만, 나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일도 수도 없이 겪는다. 아이들보다 하나 나을게 없는 감정기복 심하고 목소리만 큰 그런 엄마의 모습 말이다. 그만큼 아이 셋을 키우는 일은 만만치 않다. 거기에 나 같은 출구 없는 완벽주의자가 나타나 아이 셋을 키울라치면 그때부터는 정말로 심각해지는 거다.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럼에도 결론은 우리 삼둥이가 많은 사람의 사랑이 되어주고 희망이 되어주도록 잘 키워내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완벽한 육아는 없다. 나 혼자 힘으로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집을 유지할 수도 없다. 나 혼자서는 매 끼니를 정성 가득 핸드메이드로만은 채워줄 수 없다. 아이들과 내가 함께 갈등과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아주 잠깐의 즐거움과 보람을 보석 캐내듯이 찾아내는 것, 그것이 진짜 삼둥이 현실 육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