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우리 부부의 냉장고는 137리터였다. 그 당시 살았던 원룸집에 옵션으로 있었던 냉장고였는데 크기가 내 키보다도 작아서 냉장실 바닥에서 뭔가를 꺼내려면 허리를 아주 많이 굽혀야 했다. 이런 작은 냉장고를 가지고 뭘 제대로 해 먹고 살 수는 있는건지 친정엄마는 늘 궁금해하셨는데, 그 집에서 머무는 2년간 아주 건강하고 맛있게 잘 차려먹으며 지냈다.
처음에는 냉장고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서 마트에 다녀올 때마다 넘치는 식재료들이 생겼다. 냉장과 냉동실을 빈틈 없이 가득 채우고도 자리가 부족해서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남편과 2주정도 긴 여행을 떠나게 되어 냉장고를 텅 비워야 될 시기가 있었다. 되도록 추가로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만 밥을 해 먹었다. 고작 137리터밖에 안 되는 냉장고니까 이삼일이면 끝날 것 같았는데 의외로 냉장고 파먹기는 열흘이 넘도록 계속됐다. 그렇게 여행을 가기 전까지 냉장고 속을 비워냈고, 그날을 계기로 냉장고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137리터는 결코 우리 부부에게 작은 크기의 냉장고가 아니었다. 제대로 마음 먹고 냉장고를 채운다면 한 달 이상도 거뜬히 장을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용량이었다. 늘 작다고만 생각해서 이 냉장고를 빈틈없이 가득 채워 놓아야 뭐든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 게다가 구입한 지 한참이 지난 식재료를 소진하기 위해 억지로 무언가를 해먹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장 보러 갈 때마다 호기심에 구입했던 생소한 식재료들은 냉장고의 골칫덩이였고 먹어 해치우는 것도, 썩어서 버리는 것도 영 마음이 불편했다.
유쾌하지 않은 경험과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동안 내가 나의 냉장고를 만능 식재료 창고처럼 여기고 썼기 때문이었다. 마치 냉장고 안에 넣으면 영원히 썩지 않는 것처럼 여기며 냉장고 하나 믿고 늘 내가 먹을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입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냉장고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극한까지 냉장고를 파먹어본 경험은 냉장고의 기능과 목적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냉장고의 기능은 내부 온도를 낮춰 부패 속도를 조금 늦춰 주는 것이고, 그런 냉장고의 목적은 식재료를 구입해서 식탁에 올리기까지 신선도 유지를 위해 잠시 보관하는 곳일 뿐이다. 냉장고가 신선함을 영원히 유지해주는 만능 가전이 아님을 자각하자, 모든 것이 곧 심플해졌다.
일부러 시든 음식을 먹고 싶은 게 아니라면 굳이 가득 쟁여둘 필요가 없다. 나는 냉장고를 믿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집 근처 마트와 집 바로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을 나의 식재료 창고라 여기며 살아보기로 했다. 마트와 편의점은 식재료를 보관하는데 내 전기값도 들지 않고, 재고 관리를 위해 억지로 먹는 등 애쓸 필요도 없다. 나 대신 다른 이가 모든 것을 관리해주고 있으니, 나는 필요한 식재료를 가져올 때마다 그 값을 지불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매번 식재료나 간식을 냉장고에 쟁여두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됐다.
매일 간소하게 장을 보고, 늘 신선한 식재료로 건강하게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식재료가 조금씩 남으면 그 다음날에는 두어가지 추가 식재료만 구입해서 보충했다. 냉장고에 오래 두어 썩거나 곰팡이가 피어 버리는 식재료들이 사라졌고, 주부로서의 작은 성취감은 덤으로 따라온 기쁨이었다.
훗날 냉장고를 다시 사야하는 시기가 왔을 때, 모두가 이제는 800리터 중후반 용량의 양문형 냉장고를 구입해야할 때라고 했지만, 나는 과감하게 300리터 냉장고를 선택했다. 우리 집 냉장고는 말이 300리터지, 100리터는 김치냉장고 겸용 변온실로 사용되기에 사실 내가 쓸 수 있는 냉장칸의 용량은 100리터 남짓이다. 그러나 이 공간 또한 가득 차는 일이 드물다. 꼭 필요한 식재료와 꼭 먹고 싶은 식재료를 먹을 만큼만 구입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행사나 할인가로 나를 뒤흔드는 일은 없다. 싸게 샀다는 데에서 오는 기쁨보다 좀 더 비싸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만 구입해서 남기지 않고 다 먹었을 때 느끼는 만족스러운 알뜰함을 더 선호한다. 장은 늘 조금 부족한 듯 보고, 정 급할 때는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소량을 조금 비싸게 구입한다. 덕분에 먹기 싫은데 유통기한 임박해서 꾸역꾸역 먹어 해치워야 하는 일도 없고, 냉장고에 화석처럼 남아있는 검은봉지 속 정체 불명의 음식도 없으며, 식재료가 남거나 썩어서 버리게 되는 낭비도 없다. 언제나 야채, 과일, 하다못해 빵 한 조각이라도 가장 신선할 때 최고로 맛있게 먹는다.
집에 딸린 옵션이 아닌,
처음으로 나의 냉장고를 사게 됐을 때.
800리터 대신 구입한 297리터 냉장고.
장을 보고, 냉장고가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
장보러 가지 않는다.
그때 그때 해 먹는
간소하지만 신선하고 맛있는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