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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다면, 척택?

폐를 튼튼하게 해 줘요

by 하늬

"화가 나면, 척택을 눌러라."

경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던 한의대 예과 재학 시절에 교수님께 들었던 척택 혈의 효능입니다.


본과에 들어서고 경맥과 경혈을 배우면서도 '왜 굳이 척택을?'이라는 의문이 들었었는데요. 화가 났을 때는 심장이나 심포 경맥에 속한 경혈을 누르면 될 텐데, 폐 경맥에 속한 척택을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죠.


한의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셨던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예를 들어,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할 때 태계(신장의 경혈)를 눌러주면 좋다, 단중(임맥의 경혈)을 두드려주는 것도 좋다, 신문(심경의 경혈)이 혹은 내관(심포경의 경혈)이 효과적이다 등등. 아니 뭐 이 혈자리도 좋고 저 혈자리도 좋대, 다 좋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관을 누르면 가슴이 답답한 것에도 좋고, 소화도 도와주고, 마음도 편해진다네. 만병통치혈이야 뭐야.


이런 점이 한의학은 뭔가 딱딱 떨어지지 못하고, 과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결과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불신까지 초래하기도 하는데요.


증상은 똑같이 가슴이 답답한 것이라 해도, 그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더욱 효과적인 경맥과 경혈이 있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몸에 물이 부족한 사람이 화가 나서 가슴에 열이 치솟아 답답할 때는 태계 혈이, 기운이 체하고 뭉쳐있어 울화가 심한 사람에게는 단중 혈이, 심장의 기운 자체가 약해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문 혈이, 소화가 안 되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아 분노하여 심장과 위가 함께 무리했을 때는 내관이 좋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이병동치 동병이치(異病同治 同病異治)"라 합니다. 다른 병이라도 같은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고, 같은 병이라도 다르게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


척택은 폐 경맥의 혈자리로, 그중에서도 물에 속합니다.

12경맥은 각각 오수혈이 있는데요. 오수혈은 오행(목, 화, 토, 금, 수)과 관계됩니다.

폐 경맥의 오수혈은 소상, 어제, 태연, 경거, 척택이 있고 목화토금수의 순서대로 연결되어, 소상은 나무, 어제는 불, 태연은 흙, 경거는 금속, 척택은 물의 속성을 가지게 되죠.

척택은 폐에 열이 있을 때, 물로써 이를 식혀주는 작용을 합니다. 건조하고 열이 있는 폐를 촉촉이 적셔주어, 인후에 염증과 통증이 있거나 기침할 때 피가 나는 증상 등에 효과적입니다.


그렇다면 폐와 호흡기에 좋은 척택을 왜 화병에 활용할 수 있을까요?

심장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장기가 바로 폐인데요. 화가 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열이 오르면서 숨이 가빠집니다. 하지만 심장의 움직임은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호흡은 가능하죠.

흥분했을 때, 마음을 가라앉힐 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숨을 쉬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일반적으로 성인의 정상 심박수는 1분에 60~100회 정도입니다. 호흡은 16~20회 정도 되고요. 즉, 한 번 호흡할 때 심장은 4~5번 정도의 비율로 뛰게 되죠. 호흡을 천천히 하면 심박동도 따라서 천천히 뛰게 됩니다.

척택을 누르는 것도 이러한 의미가 있어요. 폐기능을 향상시켜 숨을 급하지 않게 천천히 깊게 쉴 수 있고, 게다가 화로 인한 심장의 열을 물로 내려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겠죠?


화가 나고 심장에 열이 생길 때 이를 식혀주는 방법은 앞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평소 폐활량이 약하고 숨이 얕고 가쁘면, 다른 장부의 경락보다 폐 경락의 경혈을 지압해주면 좋을 거예요. 특히 목이 자주 건조하다 싶으면, 그중에서도 물의 속성이 있는 척택이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척택.jpg


척택은 팔꿈치를 굽혔을 때 생기는 팔오금주름 위에 있는데요. 잘 만져보면, 위팔두갈래근힘줄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어요. 이 힘줄의 가쪽, 그러니까 엄지손가락 방향의 오목한 곳이 바로 척택입니다. 오른팔이라면 힘줄의 오른쪽이 되겠죠.

비교적 쉬운 혈자리라서, 화가 난 상황에서도 금방 찾을 수 있답니다.


척택 혈을 누른 채, 심호흡을 하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아예 화가 잘 안 나는 성격이라면 아니 화가 나는 상황이 없을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힘든 날이 있어요. 그때 척택을 활용해보세요, 분명 화병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거예요.







* 이병동치 동병이치(異病同治 同病異治)

: 예를 들어, 같은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되어도 어떤 이는 콧물이 많이 나고, 어떤 이는 목이 유난히 아프고, 어떤 이는 열이 많이 날 수 있습니다. 감기 바이러스에 공격을 받을 때, 각자 가지고 있던 약한 부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니까요.

콧물이 많이 나는 사람은 콧물을 줄여주면 하루 종일 코를 푸느라 귀찮고 코가 빨개지는 불편함이 적어질 테고, 목이 건조해서 깔깔하고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사람은 목에 염증을 줄여주고 수분을 공급해주면 훨씬 편해지겠죠. 열이 나는 사람은 열을 내려줘야 하고요.

한약을 쓰는 것도 혈자리에 침을 놓는 것도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치료하는 거예요.

온갖 좋은 약재를 다 넣고 먹는 것이 꼭 나에게 맞는 약이 아닌 것처럼, 좋다는 혈자리에 모두 다 고슴도치처럼 침을 맞는다고 좋은 것도 아니에요.

물론 지압은 침만큼 강력하고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나의 체질에 맞는 그리고 그때그때의 몸 상태와 증상에 맞는 혈자리를 찾아서 하면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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