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요. 아니면 좀 들어봐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건 노래에 대한 이야길 수도 있고, 나무에 대한 이야길 수도 있어요.
1.
얼마 전 일이에요. 그 노랠 들었어요. 음원이 아닌 라이브로요. 정말 아끼는 노래거든요. 한 번도 같은 시공간에서 실재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과일 플랫폼에서, CD로, 좀 더 그 노래가 고플 땐 유튜브로 찾아서 보고 듣던.... 그런 노래예요.
참 이상하죠. 많이 애정하는데 그렇다고 매일매일 끼고 있진 않거든요. 이름도 소리도 또 그 소리의 주체들도 말도 못 하게 좋아하는데 말이죠. 좋은 건 물고 빨고 늘 곁에 두고 만지고 보듬고 눈에 담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고 껴안고.... 온갖 난리를 쳐도 모자랄 판에 언젠가부터 이 노랜 정말 가끔씩 꺼내봐요(듣는다 보단 본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가끔이라도 볼라칠 땐 온 세상 야단법석과 호들갑으로 스스로의 정신을 쏙 빼놓는 다니깐요. 마치 오프닝 세리모니를 하는 것처럼. 사실 이 난리통에 애저녁에 진이 빠질 때도 있어요.
노래 때문에 진이 빠진다는 건 절대 아녜요. 정확히 말하면 내 몸 안에 흐르던 진액과 같은 것이 철저하게 메말랐을 때, 이미 움직이는 몸이 파리하게 되기 직전 찾는 거라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네요. 그래요. 수액과 같아요.
그렇게 깊숙이 소중히 재워둔 노랠 오랜만에 꺼내 보는 날엔 '이 덤벙이가 꺼내다가 떨어뜨리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들어 심장이 시끄럽게 펌프질을 해요. 하나, 둘, 셋. 낮은 숨 후... 소리에 마구 흩어진 마음들을 모아 한 번에 뱉어내고 삼각형 위에 손가락을 톡 올리죠.
물을 잔뜩 머금은 것만 같은 습기가 가득한 입, 물속에서 눈을 뜬 것만 같은, 꽉 찬 물방울들이 앞에 드리워진 눈을 닮은 현의 소리가 공기 중에 흩뿌려져요. 마치 나뭇잎이 바람에 파들대며 나부끼는 것처럼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되는 소리에 난장판이던 제 맘과 몸뚱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잠들어버립니다.
참 유난이죠. 형체도 없이 떠다니는 노래일 뿐인데 뭘 깨뜨리고 떨어뜨리고 난리네요. 유난이 풍년인 게 맞아요. 하지만 그만큼 귀해요. 한바탕 유난 잔치를 벌인 후에는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한껏 기울여요. 불편하지만 그런 불편 따윈 별 거 아닌 거라고... 그렇게 만나는 노래예요.
대체 어떤 노래길래. 좋으면 자꾸 보고 싶잖아요. 처음엔 마치 하늘에서 조물주가 정성을 쏟아 빚어 구어 지상으로 내려보낸 믿을 수 없는 사진 속 피사체 같은 외형의 사람을 본 것처럼. 성격, 성향, 화법 등등의 이야기들은 알 필요도 없단 듯 모두 뒤로 던져버리고 눈만 좇게 되는 사람을 본 것처럼. 자주 봤어요. 어느 순간 닳을 거 같더라고요. 유난이 점점 커진다고요.
맞아요. 처음 봤을 때,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첫 만남? 이름에 눈이 갔어요. 제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곳에 항상 있었거든요. 그 배경 앞에 나 그리고 나의 벗들 가끔은 길 위에서 사귄 동네 떠돌이개 친구들이 있어요. 걱정 없이 뛰어놀고 싸워도 금방 깔깔거렸던, 우당탕 거리며 점프하다가 엄마가 신겨주신 예쁜 회갈색 레이스 스타킹에 100원짜리 동전만 한 구멍이 나도, 화난 엄마 얼굴을 빠르게 지워버리곤 그 앞에서 신나게 뒤엉키고 구르며 뛰어놀았어요.
접시처럼 너른 그의 이파리에 문방구에서 산 설탕시럽이 잔뜩 묻은 불량식품 과자(쌀대롱을 아시나요)를 조르르 흘려 쏟아 바닥에 널브러져 먹었어요. 좋았어요. 우리 기쁜 날, 우리 좋은 날의 배경. 아름드리 덩치에 키도 엄청 크고요, 얼핏 보기에 무성해 보이는 초록을 가진 그것이요. 그 이름을 가져서 좋았어요. 그냥요.
어느 날부터, 기억에서만 사라진 줄 알았던 우리들이 하나둘 정말 사라져 가요.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또렷함, 하지만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제 손은 부끄러움 가득 느끼고 우스워지네요. 그들 중 아무나 붙잡고 꼭 껴안고 볼 부비고 싶어요. 양팔을 벌려 안으려 들면 놀랄 만큼 작아져 느껴지지도 못할 만큼의 티끌이 되어 내 몸만 연신 더듬고 있어요. 내 모습이 우습죠.
이 노랠 들으면 마음속엔 남아있지만 눈앞에서 사라진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떠올라요. 그때부터에요. 꺼내기가 힘들어진 때가요. 슬픈 게 아니에요. 꺼내면 추억의 귀퉁이부터 닳을까 봐, 마치 내 마음 같은 노랫말이 한 음절씩 삭을까 봐요.
얼마 전 일이에요. 그 노랠 들었어요. 음원이 아닌 라이브로요. 첫 음이 시작하자마자 알았어요. 손 카운트가 끝나고 나지막하지만 고운 목소리가 퍼졌죠. 좋은 것들이 모두 한 공간에 있어요. 사라진 벗들도 노랫소리를 따라 찾아온 것 같아요. 마음이 흘러넘쳐서 눈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 손을 꼬집어 가면서 들었어요. 좋은 데 울면 억울하잖아요. 닳아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보고 싶은 것들이 모두 모여들더라고요. 이젠 자주 들어요. 고맙습니다.
2.
꿈을 자주 꾸시나요. 전 꿈을 자주 꿔요. 그 꿈속에는 어떤 길이 자주 등장해요. 어떤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그 길을 오간 수를 세어본다면 한 3천 번은 넘을 것 같아요(꿈까지 합쳐서요).
전 그 길을 하염없이 달렸어요. 이건 꿈이에요. 꿈을 꽤 생생하게 꾸는 편이에요. 꿈에서 달리기를 할 때면 양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겁잖아요. 꼭 방방이 위에서 점프를 하는 것처럼요. 다리가 꼭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웅얼거리는 어린아이의 입처럼 어수룩해 지죠.
이상하죠. 꿈 속에서 이 길 위를 달릴 때, 제 다리는 새털처럼 가벼워요. 달리기에서 손목에 도장 한 번 찍혀 본 적이 없는 단거리 달리기 젬병인 저의 다리가 이렇게 가뿐할 수가 없어요. 얼굴에도 행복이 묻어나죠. 그 길 끝엔 그 아이의 집이 있거든요. 신나게 달렸어요. 보러 간다는 생각에. 그러다가 생각이 들었죠. 아, 이건 꿈이구나.
눈이 떠졌어요. 어느 날부터 습관이에요. 꿈에서 본 것 같은 날, 꿈에서 깨자마자 그 이야기들이 조금이라도 휘발될까 봐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핸드폰 노트에 적는 거요. 타닥타닥닥닥 핸드폰 키보드가 빠르게 움직여요. '꿈속에서 우린 라면도 끓여 먹었고 고무줄놀이도 했어.' 반갑고 기쁜 마음에 눈썹까지 씰룩이면서 적다가 늘 마지막은 같아요. 꿈에서만 볼 수 있단 사실이 피부에 닿는 순간 입술은 죽 앞으로 나오고 둥글어집니다.
우린 같은 동네에 살았어요. 제가 13살 때까지요. 걸어서 10분이면 그 아이의 집에 도착했어요. 뛰면 5분 이면 갔죠. 가는 길엔 아주 두텁고 키가 큰 나무들이 묵묵히 줄지어 서 있어요. 아주 널따란 잎을 가진 나무예요. 그 나무가 내는 소리를 좋아했어요. 바람에 흩날릴 때 내는 소리요. 분명 아직 가을은 오지 않았어요. 이상하죠. 초록의 잎을 가지고 있는데 마른 이파리들이 부벼지는 소리가 나요. 친구 둘이 양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우람한 몸집.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나있네요. 상처가 난 거 같아요. 아무렴 어때요. 내가 좋아하는 나무예요. 그런 나무를 하나, 둘, 셋...... 서른 그루쯤 지나면 그 아이의 집에 도착했어요.
문을 열면 늘 들리는 소리가 있어요 "언니야, 왔어?" 그 아이는 늘 절 '언니야'라고 불렀어요. 참 살가운 말이에요. 반가운 마음만큼 마중 나와 있는, 뾰족하게 솟은 그 아이의 입술 모양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그 아이는 저의 모든 걸 좋아했어요. 심지어 제가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난 인형을 줘도 마치 '보물'인 듯 소중히 다뤘어요. 몇 년을 가지고 놀았는지 몰라요. 보들 했던 인형털이 모두 뭉쳐버렸는데도 저의 손길이 남아있는 털이 뭉친 곰인형을 좋아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인 진짜로 절 진심으로 좋아했네요. 아이일 때도 성인이 되어서도요. 늘 먼저 찾아줬고 사소한 기쁨에 의미를 더해줬고 감춘 슬픔을 살짝 덜어가줬어요.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땐 눈이 반짝였어요. '언니야 언니야 너무 재밌어 또 해줘.' 밤새도록 해달라고 했죠. 첫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도요. 설레는 표정으로 '언니야 나 남친 생겼다!'라고 말하는 그 아이의 떨리는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우직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어요. 그 길을 현실에서 아무리 달려본 들, 이제 그 길 끝에 그 아인 없어요. 아마도 그랬을 테죠. 초록의 색을 가진 너른 마음은 속부터 썩어 들어갔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서서히 잠들어갈 준비를 했을지도요. 본인의 힘듦은 그렇게 주머니 속에 접어뒀겠죠. 환한 미소로 어두움 감추고 주변을 챙기느라 몸에 난 상처가 하나둘 곪아갑니다.
곪아서 터지고 마르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어요.
3.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전 가끔 영혼을 믿어요. 그날은 떠난 누군가가 찾아온 날이었어요. 분명해요.
새벽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그렇지만 아직은 진한 어둠이 하늘을 덮고 있는 깊은 밤이에요. 밖이 보이는 베란다가 붙은 어느 방 안에 잠들지 못하는 둘이 있어요. 불안해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눈이 감기질 않아요. 생각에 이름을 붙여서 꺼내 버리기로 했어요.
생각 1, 생각 2, 생각 3, 생각 4... 어디까지 수를 세어야 할까요. 꺼내 버려도 곧 다시 차버리고 마는 생각에 버리는 걸 그만두기로 했어요.
며칠 전부터 계속 멍해요. 밥은 무슨 맛인가요. 짜파게티를 3봉씩 해치우는 사람이 이것도 흥 저것도 흥 아무런 맛이 나질 않아요. 누군가가 아침에 고기를 구워줬어요. 보통은 그래요. 고기라면 환장하며 '저 빨간 고기는 대체 언제 갈색이 되지!!' 고길 앞에 두고 염불을 외듯 한다고요. 정성 들여 구워준 고길 겨우 씹어 삼킬 뿐 입에 침이 돌지 않아요. 모든 게 메말랐어요.
전 그나마 나아요. 노란옷을 입고 있는 친구가 있어요. 화장실도 가질 않아요. 밥을 소복이 담아줬어요. 줄지를 않네요. 캄캄한 어둠 속 구석진 자리를 찾았나 봐요. 몸을 철저하게 숨겼어요. 찾으려고 하면 더 깊숙이 들어가 웅크렸죠.
좋아하는 과자 봉지를 마라카스 흔들 듯 열심히 흔들었어요. '자, 나의 춤을 보아라', '이 맛있는 소리를 듣고서도 안 나올 거야?' 억지 신명을 끄집어내서 그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떨었죠. 맞아요. 늘 전 그런 역할이에요. 노란 옷을 입은 친구는 나오질 않아요. 제 몸을 구겨서 얼굴을 들이밀었어요. 좋아하는 간식을 코에 묻히고 '미안' 말을 건네며 빙구처럼 웃었어요. 귀여운 분홍색 혓바닥을 며칠 째 보질 못하네요.
여전히 우린 잠들지 못해요. 소중한 걸 꺼내기로 했어요. 몇 시간째 같은 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어요. 구슬픈 기타 소리와 작지만 예쁜, 낙오되는 소리 하나 없이 귀로 온전히 안착하는 목소리가 공기 대신 방 안을 채워요. 지금 우린 노래로 숨 쉬고 있어요. 한참을 그렇게 숨 쉬고 있었어요.
갑자기 노란 친구가 일어나요. 밖이 보이는 창 쪽으로 가네요. 한 겹 막혀있는 문을 열어달라고 손을 내밀어요. 문이 열리고 폴짝! 조금은 경쾌한 뒷발차기로 문 바깥쪽으로 뛰어 나가더니 창 밖을 보며 여러 바퀼 휘돌았어요. 그러곤 방 안으로 들어와 오독오독, 밥도 먹고 쉬이--- 소리를 내며 화장실도 다녀왔어요. 그러곤 제 옆에서 잠이 들었어요.
창 밖을 보며 짧은 인사를 합니다.
'맞아. 비가 많이 내렸어. 그래서 늦게 도착했구나. 고마워.'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요. 아니면 좀 들어봐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건 플라타너스에 대한 이야길 수도 있고, 플라타너스에 대한 이야길 수도 있어요.
꿈꿀 일이 두려워 밤새 잠 못 들고도 해요
목이 쉬도록 온종일 지저귀는 새들의 아픈 노래도 더는 들어주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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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다 괜찮다는 듯이 마른 잎사귀 흩뿌려주던
플라타너스 떠난 것은 너인데 미안한 것은 오히려 나야 오히려 나야
9와 숫자들 <유예> -플라타너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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