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허무해도 남기고 싶은 내 이야기.
태생, 널 보면 말이야. 내가 손만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은 난 널 절대로 만질 수 없고 너 역시 절대 빠져나올 수 없어 보여. 넌 속이 훤히 다 보이는 네모 반듯한 상자 안에 갇혀 있는 거 같아.
태생
1. 어떠한 곳에 태어남.
2. 수의 모체 안에서 어느 정도의 발육을 한 후에 태어나는 일. 단공류(單孔類)를 제외한 포유류에서만 볼 수 있다.
3. 불교 사생(四生)의 하나. 모태(母胎)로부터 태어나는 생물을 이른다.
4. 식물 나무에 과실이 달린 채 씨가 싹터서 유식물(幼植物)이 됨. 또는 그런 발아 형식.
태생적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시작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넌 태생이 그런 거야."
'태생'이라는 말만큼 단번에 무기력을 주고 또 아직 닿지도 않은 한계를 경험한 것 같은 xxx 착각을 주는 단어가 있을까. 마치 이 단어를 둘러싼 테두리가 보이는 듯 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존재의 이유를 달아놓은 틀에 갇힌 말. 갇힌 '태생'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늘 같은 말을 하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그 태생 말이야. 혹시 거스른 적이 있어? 아니면 누군가(사람일 수도 사물일 수도)에게 태생을 거스르는 역할을 준 적이 있어? 아주 사소한 거라도 사물에게 작은 일탈의 기회를 주는 것. 왜, 노래 가사에도 나오잖아.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 자우림 <일탈>. 지하철 타라고 만든 역에서 스트립쇼를 한대. 그럼 신도림 역은 더 이상 역이 아닌 스트립 클럽이 된 거겠지. 괴랄? 하면서 뭔가 조금 발랄하지 않아? 근데 그 스트리퍼 잡혀갔을 거 같아....
난 욕조한테 일탈의 기횔 줬어. 스트립 클럽만큼 파격적이진 않지만.... 욕조가 왜 만들어졌겠어. 평생 남의 목욕물이나 받아서 불려진 때나 찌든 기름 둥둥 띄우고. 관리라도 제대로 해주면 모를까. 늘 물에 닿아 있잖아. 만약에 말이야. 욕조가 아크릴, 자기, 에나멜, 조적.... 이런 재질이 아니라 숨 쉬는 무언가의 표피로 이뤄졌더라면 어땠을까. 쓰지 않는 늘 건조한 욕조가 아닌 이상, 그 누구의 단단하고 거친 표피일지라도... 습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을 거야.
(한평생 배추만 절이다가 가는 욕조도 있대. 이것도 나름의 일탈인 거 같긴 해)
물론 향내날 때도 있겠지. 장미꽃이 띄워져 있다던가, 솜사탕 향기가 나는 탄산음료를 한 열 캔쯤? 콸콸콸 쏟아부은 듯한, 뽀그르르 뽀그르르 피융 피융 소리 나는 제각각 크기의 방울진 거품으로 가득 찬 욕조도 있을 거야. 안개가 낀 듯 살짝 뿌옇긴 해도 나름 좋아 보여. 누군가는 그 안에서 와인을 마실 수도 있어. 좀 흘려주면 그 김에 욕조는 와인도 서너 방울 맛보겠지. 욕조 안에 사람이 한 명일지 두 명일지... 몇 명일진 나도 몰라. 암튼 대부분 물 받아놓고 있단 그 말이야. 이제 그만.
내게 욕조는 뜨근한 물 가득 채우고 몸을 데우는 곳, 그거 말고도 무언가에 집중하고 싶을 때 찾는 곳이야(별거 아니지....ㅎㅎ)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 기간, 그때가 시작이었어. 패턴은 거의 똑같아.
조금만 있다가 할까. 00시 정각이 되면 시작하자(나름의 강박).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조금 배고픈데 뭐 좀 먹고 할까.
약간의 힘만 줘도 맥없이 뜯기고 마는... 컵라면 입구를 북 열어젖히고선 김 펄펄 나는 물을 선 넘을 새라 아주 세심하게 부어. 2분 여 잠깐의 기다림은 왜 그렇게 날 초조하게 만드는지. 결국 난 약속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뚜껑을 마저 뜯어버리곤 젓가락으로 면을 마구 휘젓고, 훌훌 감아 목젖 뒤로 넘겨 버리지. 하나로 만족하면 다행이게? 부족해요... 하날 더 뜯어재끼고 맙니다.
이번 정각도 넘기고 말았어. 다음 정각을 기다릴게요. 책도 뒤적뒤적, 라디오도 들어요. CD를 골라볼까. 다이어리를 열어요. 친구한테 편지도 쓸래요..............
이렇게 굳이 지금 안 해도 되지만 시험기간 새벽에 하면 더 재밌는 일들을 눈이 벌게질 정도로 신나게 해 놓고선 등교 시간이 채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때, 급격한 불안에 휩싸일 때 즈음, 난 그곳으로 향했어. 교과서, 노트, 펜 등등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서 비장하지만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도착한 화장실. 어차피 한 세 발짝 신고는 벗어던질 슬리퍼에 굳이 발을 쑤셔 넣고 욕조로 뚜벅뚜(벅). 슬리퍼를 제거한 두 발이 욕조 안으로 들어갔고 난 그곳에 길게 누운 듯 앉은 듯 그렇게 자리했지.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욕조 안에서는 교과서, 노트, 기출문제 속 많은 활자가 내 머릿속에 빈틈없이 채워졌어. 나에게 최적화된 의자, 소파나 침대 같았어. 적당히 비스듬한 등 쪽 면의 기울기는 척추 각각의 번호가 요구하는 것을 모두 들어준 것처럼 완벽했어. 신기한 점은 분명 쿠션이라곤 1도 없는 하드한 재질인데 꽤 푹신한 쿠션감을 느꼈다는 거야. 몸이 움푹 들어가는 푹신이 아니라 무너짐 없이 단단하고 탄탄한데 또 전혀 배기는 느낌은 없는 그런 거.
베이킹 용어 중에 '머랭 치기'라고 있잖아. 달걀흰자를 연신 휘저어서 물컹하고 죽 늘어지는 살짝 누렇고 투명한 흰자를 뽀얗고(자세히 들여다보면 살짝 빛이 나기도 해) 쫀쫀하게 만드는 기술 말이야. 그렇게 만든 탄력 넘치고 쫀쫀한 거품을 쌓고 또 쌓고 또또 쌓고서는 위에 누름돌을 얹는 거야. 꽤 단단하면서도 또 푹신할 거 같지?
그래서 그랬나 봐. 욕조에 몸을 기대면 몸에 딱 맞는 몰드 안에 들어간 느낌이 들었어. 그럼 그 안에 있는 나는 몰드로부터 만들어진 목업이 되는 건가. 이 욕조 안에서 시험 준비를 하는 건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그런 상상을 하며 킬킬대면서 시험공부를 했던 거 같아.
일탈한 욕조의 정기를 받아, 높은 집중력으로.
*요약*
앞,,, 그냥 길게 말했다.
욕조에게 목욕물 받는 일이 아닌, 태생 밖 역할을 줬다.
난 시험기간 때, 마른 욕조에서 공부를 하면 꽤 집중이 잘 됐다.
지금은 집중력이 필요한 시기다.
그렇다.
-끝-
커버 사진 출처 : 사진: Unsplash의Thought Cat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