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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전하는고양이 Dec 06. 2024

그해 오월, 풀벌레 소리를 아시나요

싱그러운 청춘은 수채화 속 물 먹은 색처럼 번졌습니다.

출처  KBS 드라마 [오월의 청춘] 공식페이지 포스터




어떤 사진을 봤습니다. 사진 속에는 얼굴을 알아볼 순 없지만 또 고개까지 숙이고 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표정이 보이는 듯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정중앙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일 년 중에 오월을 제일 기다려요. 오월 밤엔 노래가 엉망이어도 이 풀벌레들이 도와주거든요. 

나랑 딱 오월 한 달만 만나볼래요?"  KBS 드라마 <오월의 청춘> 中 희태의 말




저 문장에 아름답지 않은 말이 있던가요. 오월, 밤, 노래, 풀벌레, 만나볼래요....  

저 말처럼 눈부시게 찬란하고 또 반짝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학가요제 출전을 꿈꾸는 낭만적인 의대 휴학생 '희태'가 말합니다. 어떤 여인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다 노래가 된다고요. 전화도 못하고 얼굴 떠올릴 사진도 없고 밤도 너무 긴데... 이래서 가사를 쓰나 보다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어떤 여인을 온 마음 가득 품고 있습니다.


단번에 혈관을 잡아내는 응급실 간호사 '명희'는 독일 유학을 꿈꾸고 있습니다. 친구 대신 나간 맞선에서 말쑥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 걸 알고 있지만 사랑이 맘처럼 쉽게 되나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빠다빵 먹으러 빵집도 가고, 배인숙 노래 들으러 음악다방도 가고, 서점 가서 시집도 읽고... 남들 하는 보통의 연애를 합니다.


마치 밤톨을 깎아놓은 것마냥 까까머리를 한 소년 '명수'가 있습니다. 타고난 달리기 실력 하나로 변변한 운동화 없이 맨발로 '소년체전 달리기 도대표' 자격을 따 낸, '될 성 부른 나무'가 될 진초록색 '떡잎'입니다. 가끔 운동부 연습을 뺑이치고 친구와 만화방에서 일탈의 시간을 보내며 깔깔대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귀엽습니다.


잔 다르크 혹은 위선자. 지역 유지의 딸 '수련'을 부르는 말입니다. 주위에선 수련을 향해 자본을 등에 업고 확성기를 드는, 집안을 위해 대공수사과장 아들과 약혼을 하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수련은 스스로의 상황에 혼란스러워 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정말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환한 꽃을 피우려 하는 '수련' 같은 사람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석, 부잣집 도련님 '수찬'은 허세 없이 모든 이에게 같은 미소를 보입니다. 동생의 친구를 짝사랑하는 순정남이기도 합니다. 평소엔 다정다감하고 책임감 있는 수찬이지만 짝사랑의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맘에 품은 걸 알고선 어린아이 같은 질투심에 휩싸여 속상해합니다. 국력에 보탬이 되는 든든한 인재이기도 합니다.


'경수'는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입니다. 강직한 마음과 동물과 식물에도 진한 사랑을 주는 선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학생운동 도중 다친 동료들을 '희태'에게로 데려와 치료를 부탁하는 마음 따뜻한 청년입니다.




주변을 둘러 잘 찾아보면 '없을 것' 같기보단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사람들. 흐릿한 '전조'가 짙은 '소용돌이'로 탈바꿈한 어느 해 오월, 아름다운 주변 사람들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희태'는 어느 날 계엄군 앞에 쓰러져 있는 그녈 봤습니다. 그녀 대신에 머리를 가격 당했고 숨통도 끊길 뻔했습니다. 결국엔 연행까지 되었습니다. '명희'는 오늘 사랑하는 남자와 처음으로 밤을 보냈다고 합니다. 새벽부터 그녀가 코 안 골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그의 말에 "나 코 골아요?"라고 말하곤 수줍어서 그의 한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습니다. 그날 밤, '명희'는 동생을 살리려 군 앞에 몸을 내던졌고 하얀 옷이 붉게 물들어 갈 때, 오월의 풀벌레 소릴 들으며 잠이 듭니다. 


학생운동 도중 붙잡혀 강제 입대를 한 '경수'는 계엄군으로 투입이 됩니다. 시민들을 향해 총기를 겨누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해 고문관 역할을 면치 못합니다. 다른 계엄군들 방아쇠의 표적이 된 시민들을 보며 그의 눈엔 눈물이 맺힙니다. 그의 방아쇠는 영원히 침묵합니다. 시민들은 불순분자가 아니니까요. 누나 '명희'가 앞만 보고 달리란 말에 까까머리 '명수'는 눈이 벌게져서 자신의 특기인 달리기를 합니다. 뛰어가는 명수의 등 뒤에서 누나의 작별 인사 대신 슬픈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계엄군에 연행돼 인간취급 못 받다가 3일 만에 풀려난 '수찬'은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함께 연행된 사람들은 생사도 모르는데 홀로 풀려난 게 참을 수 없이 부끄럽습니다. 대공수사과장의 힘으로 풀려나 침대에 누웠을 때 '편안하다'라는 생각을 한 자신이 너무 비겁해 견딜 수 없습니다. 이런 '수찬'에게 '수련'은 당장 우리가 뭘 바꿀 순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고 말합니다.


그해 오월 광주, 바라보기만 해도 '쨍'하니 눈을 튕길 것만 같은 싱그러운 꿈과 청춘은 눈물이 고이고 또 고여 마치 수채화 속 물 먹은 색처럼 번졌습니다. 모든 일상은 먹먹해졌습니다.


감히, 제가 여기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요. 






이건 제 이야깁니다. 제가 사는 곳에는 군용 헬기가 가끔 뜹니다. 처음 헬기 소리를 들었을 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소리에 많이 놀랐지만 몇 번 듣고 나니 그것마저도 익숙해졌습니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도 저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았습니다. 헬기 소리에 떠들썩하던 지역 카페는 어느 순간부터 하늘이 쿵쿵거리는 소리에도 큰 소란이 없었습니다.


며칠 전 저녁, 어지러운 맘을 안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쿵쿵거렸습니다. 낮에 비가 내렸던지라 또 비가 오려나, 천둥이 치는 건가 했지만 그전에 번쩍이는 번개를 느끼지 못해 '비는 아닌가 보다'하고 전 다시 걸었습니다. 잠시 후 또다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저도, 주변에 산책 중이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섭니다. 웅성거립니다. 휴대폰을 확인합니다. 그리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빛을 공유합니다. 말하진 않았지만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합니다. 이건 '불안'입니다. 그 소린 공사장에서 난 걸까요. 다행히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는 몇 차례 더 난 뒤 들리지 않았습니다. 


불안, 실망, 기다림, 고통, 괴로움 그리고 공포가 지속되는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게 맞는 걸까요.


손발도 시리고 코도 시리고 마음도 시린, 사계절 중 가장 추운 겨울입니다. 산책을 마칠 때쯤,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겨울은 춥지만 겨울 하늘은 사계절 중 가장 따뜻합니다. 타오르는 별들이 많이, 잘 보이는 계절이니까요. 날 선 바람이 몸을 매섭게 할퀴고 갑니다. 어느 때보다도 활활 불타오르는 겨울의 하늘을 보며 얼어붙고 경직된 몸을 잠시나마 녹여봅니다. 평소보다 많은 별이 보입니다. 사람들의 타오르는 마음이 보이는 걸까요. 마치 엉망인 노래를 감싸주는 그해 오월의 풀벌레 소리 같네요. 






가늠할 수 없이 무거운 일을

잴 수 없을 만큼 가벼이 쓴 잡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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