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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Dec 14. 2023

동거의 시작

3년 비혼 동거 기록_시작

 2020년 2월 제주에 왔다. 그때부터 우리의 ‘동거’가 시작됐다. 처음엔 두 달인가, 세 달을 기약하고 온 것이었다. 제주에서 뮤지컬을 기획하고 있어서 연습과 준비 겸 남자친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당분간 같이 지내기로 했다. 작은 시골집의 아마도 창고를 개조했을 원룸이었지만, 두어 달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낸 시간은 6개월, 그리고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뮤지컬 작업은 계획이 보류되었다. 그해 이른 봄부터 시작된 코로나 국면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학교들은 휴교를 했고, 공연들도 취소되었다. 학교에서 할 계획이던 뮤지컬이 작업이 보류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서울로 가지 않았다. 대신 제주도에서 함께 살 집을 구할 준비를 했다. 나는 남동생이 결혼 준비 겸 회사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같이 살던 투룸 전셋집을 빼고 나온 참이었다. 1억 2천만 원이던 전세금을 빼서 둘이 나눴다. 동생은 새 전셋집 보증금에 돈을 보탰고, 5-6천의 보증금으로 서울에 집 구하기를 보류-또는 포기한 나는 그 돈을 부모님께 맡기고 제주도에 왔다. 남자친구가 살던 집은 8월 초에 계약이 만료될 예정이었고, 왜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5월에 들어서면서 같이 살 집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서, 어버이날에 부모님 집에 다녀오면서 어떤 장기적인 계획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었다.

 

제주도 집값은 몇 년 새 많이 올라서 우리 예산-대출을 고려하더라도-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무척 제한적이었다. 그러다 당시 살고 있던 동네와 정 반대인 동쪽 끝에서 마당이 있는 전세 주택을 봤고, 마당에 컨테이너를 두고 남자친구의 작업실로 쓰면서 적응을 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볼 수 있는 매물 자체가 너무 없어서 마음이 급해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지금 같았으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은 집이었다.      

전세 보증금은 대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당시 우리가 가진 돈은 계약금을 내기에도 부족했다. 엄마에게 전화해 계약금 낼 돈을 빌리려는데, 바로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빠였다. 부모님은 대체로 내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입장이셨기 때문에, 집을 구하고, 남자친구와 같이 사는 일도 큰 문제없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껄끄러운 주제 혹은 문제인 걸 알고 애써 가볍게 넘어가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빠는 두 달 뮤지컬 때문에 갔던 제주에서 제대로 된 상의도 없이 전세계약을 하겠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것도 대출을 받아, 남자친구와 함께. 글쎄, 둘 중 한 조건이라도 달랐다면 그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으셨을까? 나는 내가 살 곳을 정한다는 것, 그리고 함께 살 사람을 정한다는 것에 그 정도의 무게감을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전셋집을 구하더라도 원할 때면 언제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해서도 ‘평생의 동반자’와 같은 엄숙한 것이 아니라 ‘편안한 룸메이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둘 다 생각하는 것처럼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다.     


아빠가 그렇게까지 화를 내신 건 나한테도 충격적이었다. 물론 아빠도 딸이 갑자기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제대로 인사 한 번 시켜준 적 없는 남자친구와 전셋집을 구해서 산다는데 기가 찼을 것이다. 그 당시 아빠의 건강과 컨디션도 별로 좋지 않았고. 그때 상황이나 감정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도 많이 힘들었다. 아빠에게 이렇게까지 야단을 맞고 심한 말을 들은 것도, 그렇게 크게 대든 것도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결국엔 내 고집대로 했다. 딱히 고집을 내세우고 우기지 않더라도,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게 고집이다. 결국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 원래 계약하려던 전셋집은 하지 않았지만, 더 가까운 곳에서 연세 집을 찾았다. 집에 붙어 있는 창고를 작업실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가까운 만큼 이사도 수월할 터였다. 연세는 결국 월세처럼 나가는 돈이라서 지출이 있겠지만, 그래도 아주 저렴한 수준이었고, 마당이 넓어서 마음먹으면 텃밭도 가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뭔가 킨포크스러운 제주 생활을 그려 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집에서는 2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 이사를 하면서 이웃에서 묶여 살던 강아지를 데려와 같이 살았다. 잠시 데려와 함께 지내다 좋은 가족을 찾아주려고 했던 것인데, 그 강아지는 결국 우리와 가족이 되었고, 그 아이의 어미, 형제 강아지들을 구조해서 입양을 보내기도 했다. 새로운 집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은 개들을 구조하려고 애썼던 시간인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은 정말 화살처럼 빨라서 지금 집에 이사 온 지도 일 년이 지났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부터 생각하면 이제 곧 4년째가 되어 간다. 지금 지내는 동네는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지냈던 동네와 차로 10분이 안 걸리는 거리다. 바로 전에 살던 집과는 15분 정도의 거리이고. 그러니 한 곳에 터를 잡고 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사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나 혼자 가볍게 어디로든, 어디서든 얼마 동안이든 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지금 나는 개 때문에 제주 내에서 1박 2일 외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내 의사와 달리 책임질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만큼 성장했는지, 자격을 갖췄는지 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어물쩍 사람 2, 개 1의 가족을 이루게 됐다. 어떤 행사도 없었고, 작성한 서류라고는 동물 등록증뿐이다. 동거 이야기라기에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적게 등장한 남자친구와는 같은 세대에 이름을 나란히 올리고, 내가 그의 피보험자가 됐을 뿐이다. 애매한 느낌은 종종 든다. 우리는 같이 다니면 ‘부부’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만큼 나이가 들었고, 자식은 없지만 개를 공동 육아한다. 각자 일은 다르지만 작은 숙소를 함께 운영하고, 이런저런 수입을 합해 생활을 함께 꾸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결혼’과 얼마나 다를까?      

나는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때로 애매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결혼을 굳이 안 할 이유가 있나? 싶다가도 굳이 결혼을 할 이유는 뭘까? 싶기도 하다. 내가 ‘결혼’을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떤 반감 때문인가 생각한다. 괜한 반항심은 아닐까, 내가 갖는 반발감은 이유가 논리적인가? 왜 결혼을 하는 데는 논리적인 이유를 찾지 않으면서, 결혼을 하지 않는 데는 논리적인 이유를 찾아야 하는가. 우리가 기본값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을 정말 기본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머릿속에서 우후죽순 중구난방 떠도는 질문들을 이제는 차분히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건 3년 전에 했어야 했지만, 3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 같기도 하다.      


시간 순으로 16개의 목차를 적었고, 대단한 고찰이 되지 못하더라도, 지난 시간에 대한 기록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기록이라도 남겨놓으면 적어도 그 시간이 조금은 더 의미 있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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