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기 Jan 11. 2024

어쩌다 제주에 살게 되었나

어쩌다 동거

종종 나는 내가 어쩌다 제주에 살게 되었나 생각을 한다. 가끔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내게는 그런 뚜렷한 계기나 이유가 없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지나온 많은 일들, 결정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어쩌나 보니.      


특히 연기를 시작한 일이 그랬는데, 나는 졸업 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중,  고등학교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했던 모교에서 도서관 담당 교사로 한 학기 동안 일을 했다. 학교 근무를 마치고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곳은 요식업, 서비스 직이었다. 커피를 좋아해서 카페에서 일을 해 보고 싶었는데, 잠깐 경험한 카페 알바가 괜찮았고, 서비스직에도 지원을 해 봤는데 덜컥 면접에 합격한 것이다. 전공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이직이었고, 그러던 중에 배우 워크숍이 있는 것을 보고 신청했다.- 는 것이 내가 연기에 관심을 갖고 시작한 계기의 전부이다. 

지금은 무슨 생각으로 그 워크숍을 신청한 건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데, 아마 내게 뭔가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취업을 한 곳은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였고, 카페처럼 바 안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홀 전체를 서빙하고 살피는 일이어서 낯설기는 했지만 꽤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직접 현장에서 해결 가능한 일을 한다는 점이 단순하고 좋았던 것 같다. 야근도 없었고. (문제가 생겨도 리스크가 적은 일이라는 점이 스트레스가 덜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처음엔 긴장을 했는지 서빙하는 꿈을 자주 꿨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배우 워크숍이 시작됐고, 저녁에 있는 수업 때문에 저녁 근무를 할 수 없어 같은 매장에서 오전에만 일 할 수 있는 파트타임으로 전환했다. 돌이켜 보면 그 정만 해도 꽤 대단한 열정인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 달에 60만 원 정도 되는 워크숍 수업비를 내야 했는데, 전에도 많은 월급이 아니었지만, 파트타임을 80만 원 정도를 벌고 남은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건 너무 힘들었다.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인데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같이 워크숍에 참가하던 대전에서 올라온 친구가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생활비를 조금 냈고 그걸로 빠듯하게 충당했던 것 같다. 

워크숍에서는 발레, 노래, 재즈, 연기 수업 등을 했는데, 수업을 할 때 만은 정말 열심히, 즐겁게 했지만 늘 더 열심히, 더 많이 연습하지 않아서 부족한 나날이었고, 일은 단순했지만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쉽지만은 않았고 늘 생활고로 눌려 있었다. 

그 이후 연극을 시작하면서는 부모님께 손도 잘 벌리고, 이렇다 할 수입이나 일 없이도 어찌어찌 잘 살아냈는데 그때는 오히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던 것 같다. 


추울 때 시작한 워크숍이 여름 장마철에 끝났다. 강남에 물난리가 나던 2011년 워크숍 연습실은 사당에 있었다. 실제로 수재를 겪기도 했다. 밤늦게 연습을 하고 사당에서 자취를 하던 언니 집에서 자고 다음날 동부이촌동으로 출근을 하려는 계획이었는데, 바닥에서 자고 있던 내가 먼저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주변으로 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급한 대로 침대 위로 짐들을 올려놓았는데, 물은 순식간에 침대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다. 물을 퍼내다가 출근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섰는데, 지하철 안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한 차림인데, 나만 슬리퍼에 씻지도 못하고 황망한 꼴이어서 괜히 소외된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느낌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슬리퍼를 신은 나의 발과 다른 사람들의 깨끗한 운동화나 구두를 비교했던 이미지는 제법 선명하게 남아있다.      

에피소드도 많았고, 힘들게 준비한 끝에 공연을 올렸다. 돈이 없어서 염치 불고하고 다른 팀에 같은 배역을 하던 친구의 옷을 빌려 입었는데, 그 친구가 안 좋아하던 분위기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그것 말고도 지금 생각하면 부족함뿐인 공연이었겠지만, 그래도 6개월간 고생한 끝에 또 일이 끝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마다 열심히 연습한 끝에 올린 공연이었다. 

친구도 케이크를 들고 공연을 보러 와 줬고, 엄마아빠도 멀리서 와서 꽃다발을 줬다. 

그때를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슬퍼진다. 그때 우리에겐 어떤 기대가 있었을까. 지금 거기로부터,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나. 공연을 마치고 나는 어떤 길로 갔어야 했을까.     


공연까지 마쳤을 즈음 아마 나는 많이 지쳐있었지만 그때는 스스로가 지쳐있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피곤한 일정과 빠듯한 경제(생활비) 상황을 생각하면 그때 바랐던 대로 조금 쉬었어야 했는데, 같이 워크숍을 했던 열정 넘치는 친구들이 같이 재즈댄스 수업을 더 하자는 걸 뿌리치지 못했다.      

무리했던 결과로 폐렴에 걸렸고, 2주 간 입원한 후 나는 몸을 많이 사리는 사람이 되었다. 결과나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것보다 내 몸을 챙기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      

몸을 사리지 않을 때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통념이고, 맞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많아서 나는 늘 나에게 만족하지를 못했다. 연극하는 동안에도 그랬고, 연극을 그만두고 제주에 내려와서 지내는 동안도 그랬던 것 같다. 나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것이, 제주에 살기로 한 결정, 짝꿍과 함께 살기로 한 결정에 큰 무게감을 주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내 삶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내린 결정에 무게감을 부여하는 것이 두려워서.       


무거운 결정이라고 생각하건, 가벼운 결정이라고 생각하건 인생은, 시간은 흘러간다. 어떨 때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다가, 어떨 때는 나이, 가족, 사회적 시선, 삶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들이 갑자기 무겁게 밀려온다.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그래도 내게 맞는 답은 있겠지. 과연 이렇게 나의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아직 아무 예감이 들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