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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an 26. 2024

개 얘기 말고 내 얘기

진짜 해야 할 이야기를 시작해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왜 결혼이 하기 싫은가, 내가 하기 싫은 것은 결혼식인가, 결혼인가, 법적 구속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 썼다. 그리고 이제는 내(우리) (동거) 생활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생활을 그냥 쓰는 건 재미없으니, 목차에 맞게 구성을 해 보려고 하는데, 이번에 쓸 것은 개에 대한 이야기이고, 개 때문에 동거가 시작됐다고 해도 어쩌면 과언은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는 연극을 하다가 만났다. 사귀기로 한 것보다 데이트를 먼저 시작했는데, 그래서 사귄 건 북촌에 어느 와인 가게에서 와인을 마시다가 그날로 정하기로 했다. 10월 5일이었는지, 10일이었는지 매번 헷갈리고, 그래서 그 날짜는 챙기지 않는다. 사실 생일과 크리스마스 챙기는 걸로 기념일은 충분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숫자나 날짜에 신기할 정도로 약한데, 우리 강아지 생일로 정하기로 한 날짜-이것도 정확하지 않으므로-나, 입양한 날짜 같은 것도 하나도 챙기지 않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연극을 하면서 만났고, 공유한 많은 기억이 연극과 관련되어 있는데, 연출이던 A가 연극을 그만두겠다고 하며 제주도로 떠났다. 원래도 손재주가 많았고, 자기 작품과 극단 작품은 물론, 조연출로 참여하는 작업에서도 여러 소품들을 직접 만들기도 했는데, 나무로 하는 작업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서울에서 하는 목공수업 같은 것에도 관심이 있어서 찾아봤지만 비용이나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시작을 못 했는데, 일단 제주도에 아주 작은 창고가 있는 집을 친구와 같이 빌려서 혼자 작업을 시작해 보겠다고 했다. 혼자였다면 어려웠겠지만, 친구네 가족이 제주도로 이주를 결정하면서 같이 집을 빌리게 되어 일단 수월하게 이사를 했다. 그리고 정말 가로 세로가 각각 2미터도 안 되는 작은 나무 창고에서 커피스쿱이나, 버터나이프 같은 걸 만들기 시작했다. 숟가락과 젓가락도 만들었다. 플리마켓에도 나가고, 지역 매거진에 실리기도 했다. 혼자서 그렇게 하나씩 만들기 시작해서 사업자를 내고, 수입도 얻기 시작한다는 게 신기하고, 대견했다.     

함께 참여했던 플리마켓

나도 A가 제주도로 간 후 반년 정도 지났을 때 극단을 쉬겠다고 말했다. 연극이나 연기를 아예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말 그대로 극단을 떠나 조금 쉬면서 다른 쪽으로도 고민해 볼 시간을 갖고 싶었다. 막연하긴 했지만 더 이상 극단에서 활동하기에 지쳐있었던 것 같다. 일 하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데, 계속 그 집단에 있을 수는 없었고, 멀리 떨어져서 생각을 하고 싶었다. 대단하게는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신변 정리와 공부도 필요했다. 일정한 수입 없이 지낸 지가 오래되어서 최소한이라도 일정 수입이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했던 일은 서울 시청에서 ‘문서 보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었는데, 아침에 조금 일찍 출근해, 탕비실이라던가, 사무실 환경을 정리해 두고, 업무가 시작되면 시청 본청으로 오는 우편물들을 별관으로 가져와 구분해서 각 부서에 나눠주는 일이었다. 사무실에서 필요한 심부름을 하기도 했고, 탕비실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기도 했다. 주로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이나, 아이들이 다 자라서 오전시간이 한가한 주부들이 하는 일이었다. 예술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은 편인데 주로 오후-저녁에 일이 많은 직업 특성상 오전 시간을 이용해 최소한의 수입을 얻으려는 이유에서였다. 나도 그런 이유였는데, 하루 3시간 근무가 힘들지는 않아도 오가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꽤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고, 저녁에 연습까지 하면 너무 피곤했다. 낮 시간에 잡히는 연습에는 애매하게 늦게 될 때도 많아서 차라리 마음 편하게 알바를 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오전에 일 하고 집에 와서 공부를 하려던 계획은 하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았다. 11시에 일이 끝나 점심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집에 와서 밥까지 먹으면 1시는 훌쩍 넘었다. 잠깐 쉬자고 생각하면 금방 2-3시가 되고, 그때부터는 오후라서 뭘 시작하기에는 늦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은 유튜브에 책 읽는 채널을 운영하기도 했다. 낭독공연 하는 것을 좋아해서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소감을 나누는 게 재밌을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책을 소개해주는 유튜브 채널들도 많이 생길 때라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생각보다 구독자도 꽤 늘고, 조회수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 정도의 반응도 있을 줄 모르고 시작을 했고, 수입을 목표로 한 것도 아니었기에, 저작권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안이하게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한 작품을 읽은 것이 꽤 많은 시청기록을 올리고, 댓글이 달렸는데, 저작권 문제 소지가 있으니 연락을 달라는 것이었다. 덜컥 겁이 나 연락을 했더니 저작권 협회에서 합의금이 200만 원이라고 했고, 고발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모아놓은 돈도, 수입도 오전에 하던 아르바이트비가 전부였는데, 삼십 대 중반의 나는 그 돈도 없었다. 물론 돈이 있다고 해도 속이 쓰린 돈인 건 맞지만, 그때의 내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출판사에 연락을 했지만 바로 답변을 받을 수 없었고, 그래도 운 좋게 저작권자에게 이메일로 직접 연락을 할 수 있게 돼서 다행히 돈은 안 내고 해결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는 수입도 창출하지 않고 좋은 작품을 소개해주는 채널까지 단속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최근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저작권 도용 사례 때문에 저작권협회에 관리를 일임한 것이라고 했다. 채널이 확장되거나 수입이 따르기 전까지 책을 읽고 소개해도 좋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그때부터 왠지 위축되어 더 이상 책을 읽고 채널을 운영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됐다. 출판사에 먼저 동의를 얻고 시작을 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런 마음이 좀처럼 먹어지질 않았다. 처음부터 조금 쑥스럽고 번거롭더라도 연락을 하고 책을 소개하는 과정을 겪었더라면 좋았을 걸. 쉽게 가려고 하면 늘 탈이 난다는 걸 또 깨달았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오전 알바를 하면서 오후에는 하는 일이 없는 상태로 한참을 보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제주에 갔다. 그때쯤 에는 오전에 하는 알바 말고는 사실 서울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별로 없었다. 책을 읽고, 유튜브 채널에 올리는 것도 그렇긴 했지만, (그것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적당한 책을 고르고, 몇 번 읽어보고, 연습하고, 영상을 찍고, (편집은 많이 안 했지만) 업로드하고. 오후 시간이 거의 다 가는 일이었다.(그렇게 열정을 다 할 일이었으면 저작권 협의는 왜 사전에 하지 않은 걸까.) 

매일 20분씩 올릴 계획이었고, 100개를 올리는 게 목표였는지, 365개를 올리는 게 목표였는지 아무튼 지금 생각하면 꽤 거창한 목표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루에 20분 책 읽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걸 매일 편집해서 올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라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그런데 그걸 못 하게 됐으니, 갑자기 시간이 많이 남았고, 다시 허송세월을 하게 됐다. 여름에 그런 일이 있었고, 한 반년 정도를 허송세월을 했는데, 그 사이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참 유행이었던 곤도 마리에의 책을 보면서 정리도 했고, (늘 책 정리 -> 추억의 물건 정리  부분에서 멈춰서 종이로 된 추억의 물건들만 엄청 뚱뚱하다.) 뜨개질도 했다. 몇 가지 관심 있는 모임에 가면서 예전에 알던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 끊어졌던 사교생활도 좀 하기는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백수로서 반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고, 그러면서 제주도에는 강아지들을 보러 더 자주 가게 됐다.     

정리하는 중
뜨개질한다고 잔뜩 구입한 실 실을 잔뜩 샀다

시청 일을 한 지도 일 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너무 빨랐고, 수입이 넉넉한 일도,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일도, 그리고 작업 때문에 하는 일도 아닌데 너무 오래 매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하고 있으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오후 시간이 보장되는 일이었지만, 고용과 연금,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자리 사각지대인 데다가, 서울에서 생활할 수 없는 수준의 벌이인데, 내 상태는 더 이상의 일자리를 찾아보거나 해 낼 의욕과 체력도 없었다. 경미한 우울증의 단계에 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좀 더 쉬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마침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라는 책이 나와서 제목에 공감이 크게 됐는데, 책을 읽지는 않았다. 조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종류의 책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읽게 되지는 않는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제목의 책들이다. 아마,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라고 말하면서 책까지 쓴 저자를 샘내서 읽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제목만 읽고, (책까지 읽으면 나의 모자람만 더 느끼게 될 것 같아서) 별 거 안 해도  번아웃이 될 수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나도 번아웃이거나 우울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서울에서 지내는 겨울 동안 강아지들을 자주 궁금해했고, 한 번씩 가면 강아지들과 길게 산책을 했다. 그 해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았고, 시청 앞 사거리의 바람은 매서웠고, 일이 끝나면 허기를 채우고 집에 들어가려고 해서 벌이의 많은 부분이 식비로 들어갔다. 동생이 회사 근처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회사가 강동구 쪽으로 이사를 했는데, 남가좌동에서 계속 다니기는 너무 힘들었고, 집 계약 기간이 끝날 시기에 맞춰 이사를 하기로 했다. 나도 그 집에서 나와야 하는데, 거취가 정해진 곳이 없으니 일단 짐은 부모님 댁에 두고, 봄 학기에 제주도 학교에서 할 뮤지컬을 준비하러 제주도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 A의 집은 창고를 개조한 좁디좁은 원룸이었지만 당분간 살 것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제주에 온 건 2020년 2월이다. 바야흐로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번지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마스크 착용이 권장-에서 의무화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됐다. 학교들의 개학이 미뤄졌고, 우리가 준비하려고 했던 뮤지컬은 확정이 되지 않은 채로 계속 미뤄지다가 4월에는 잠정 취소가 되었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다시 돌아갈지, 제주에 계속 있을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왠지 당연하게 제주에 더 있기로 했고, A와 함께 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모님은 짐을 다 집에 부려두고 간 딸이 두 달 기한을 두고 내려간 제주에서 돌아오지 않고 계속 지내겠다니, 그것도 남자친구와 같이 살겠다니 당황스러운 상황이 된 것이다. 

나의, 우리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됐다. 개 얘기를 쓴다면서 내 얘기만 잔뜩 써 버렸지만, 그 집 앞에 개가 없었다면 제주도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덜 하지 않았을까, 제주도에서 지내면서 개들의 입양처를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이곳에 더 붙잡아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종종 개 때문에 이 섬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그때는 개 때문에 이 섬에 살기로 하다니. 사실 그때는 한 일-이년이 지나면 떠나게 될 거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나라지만, 그때의 내 결정을 설명하기란 참 어렵다. 누구와 같이 살지, 어디서 살지를 깊이 고민하지 않고 그때 해야 할 일-이라기 보단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곳에 머물렀다는 게 맞겠다. 그리고 그 결정이 지금까지 이어져 이 글을 쓰고 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새끼 강아지, 지금은 이제는 우리집 강아지 보리 강아지.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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