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와 상관없는 단상들
영화 머니볼을 보면 잘생긴 브래드피트를 비롯한 많은 영화 속 야구 관계자들이 수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종이컵에 뭔가를 뱉어내는 걸 볼 수 있다. 그게 뭔지 너무 궁금했는데, 야구 덕질을 하는 친구가 열과 성을 다해 알려주고, 같이 인터넷으로 다양한 현실 야구장면에서의 존재 장면까지 찾아줘서 그게 해바라기씨 껍질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그 해바라기씨라는 것을 카자흐스탄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처음 알게 됐는데, 노소를 막론하고 남성 청년들이 나무 아래서 그걸 까먹으며 서 있다가 그 자리를 떠나면 나무뿌리 주변에 껍질이 말 그대로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하루이틀 쌓인 게 아니니 ‘수북이’ 되는 것이겠지.
정체를 알고 있을 뿐 나는 그 해바라기씨에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지난해 공연을 하며 친하게 된 언니가 러시아 유학시절부터 많이 먹었다며 그걸 좋아해서,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한 봉지를 사놓고, 하룻밤에 반 정도를 까먹었고, 남은 반이 우리 집 냉장고에 가을 내내 남아있었다.(이제 한겨울인데 날씨는 도무지 한겨울 같지가 않다.)
요즘 함께 지내며 미뤄둔 작업을 각자 도모하는 중인 친구와 마실 커피를 준비하다가 마침 그 해바라기씨에 생각이 미쳐 오랜만에 꺼내보았고, 한번 시작하자 멈출 수 없게 되어 계속 까먹으며 이 글을 시작한다. 마치 뭔가를 씹어야 집중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야구 선수들이 해바라기씨를 계속 먹고 있는 이유가 근육을 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데, (그래서 번거로워도 꼭 껍질이 있는 해바라기씨를 먹는 모양이다. 나는 위가 좀 쉴 시간을 줘야 하는데) 나도 저작근 운동을 하면서 글을 쓸 근육이 움직이기를 기다린다. 원래는 어제까지 다 쓰고 올리기로 한 글인데 오늘 11시 반에야 한 시간 내에 쓰기로 목표를 잡고 시작을 한다. 어제는 너무 배가 부르고, 앉아서 글을 쓰기엔 몸이 안 좋아서 춥고, 침대 안으로 노트북을 갖고 들어갔다가 재밌는 드라마 요약 클립을 보다가 조는 바람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배가 부른 채로 그냥 자 버렸다. 이불 밖으로 손을 꺼내는 게 너무 시렸다.
아침에는 비가 와서 늦잠을 잤다. 더 자도 뭐랄 사람은 없지만 왠지 더 잠이 오진 않는다. 이불을 정리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정리하는 게 생활습관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보리도 같이 자는 침대 정리가 조금 오래 걸린다.) 어제 남겨온 방어회와 고등어회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 동네 언니가 준 브로콜리도 살짝 데쳐서 잘게 잘라 같이 줬다.
커피까지 마시기에는 보리에게 너무한 일 같아서 산책을 나섰는데, 비에 젖은 풍경이 촉촉하고 예쁘다. 비가 계속 내렸다면 산책을 가기 싫었을 텐데, 집에서 요가를 한다고 남아 있는 친구를 안 데려온 것이 아쉽게 느껴질 만큼 청량하다. 보리 발과 배가 실시간으로 더러워지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산책을 하면서 어제 못 쓴 글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써서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고, 그 사이 생긴 두 명의 구독자에게 예의를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부끄럽고, 그러면서도 뭘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목차를 정해뒀지만 이번 회차에 써야 할 주제가 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쓴다는 게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니..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쓰려면 그 사이에 많은 생각들을 하고, 그걸 정리하면 되겠다는 나의 예상은 빗나가고 있다. 나는 동거를 하고 있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은 그렇게 수시로 떠오르지 않는다.
가끔 결혼식은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한데, 어떤 결혼식이 좋을까 생각하면 금세 피곤해진다. 요즘에는 ‘약혼식’ 같은걸 가족들만 모인 자리에서 간단히 하면 어떨까 생각도 한다.
결혼-을 한다라는 것에는, 혼인 신고를 한다, 결혼식을 한다, 함께 산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합쳐져 있다. ‘혼인 신고’에 대해서는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주류로서의 기득권 같아서 선택하기 불편한 점이 있다는 고민이-여전히- 있다. ‘결혼식’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고.
‘함께 산다’는 부분 때문에 결혼에 대한 고민이 자꾸 뒷전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일상을 지속하는 데에도 꽤 많은 에너지가 들기도 하고, 결혼을 결정하는 데 있어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차지하는 자리가 클 텐데 그걸 이미 하고 있으니 어쩌면 고민해야 할 부분은 위에 두 가지가 전부일 수도 있고, 지금의 삶-생활을 어떻게 ‘유지’또는 나아가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라서 그게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에도 꽤 많은 에너지와 때로는 운도 있어야 한다. 하루하루는 바쁘다. 도시를 떠나 제주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은 때로 혼자 밥 먹고 살기에도 벅찬데,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그만큼 의지가 되고 짐이 나눠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배가 되기도 하고, 우리에게는 강아지까지 세 명의 존재가 한 집에서 먹고사는데 바쁘지 않을 리가 없다. 거기에 우리처럼 일과 생활의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생활 또는 사교생활까지 공유하게 되고, 그 생활 안에서 익숙해지게 되면 더 이상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각자 또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그에 대한 고민들만 남는 것이다. (물론 이웃 삼춘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분들에게는 국수 한 그릇이라도 내놓는 잔치도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 더 늦기 전에 애기도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살다 보면 결혼에 대한 고민 같은 건 구석에 처박히든 공기 속으로 흩어지든 연해지거나 멀어지고, 생활과 실존에 대한 고민만 남는데, 어쩌면 다른 많은 이들은 결혼 이후에, 혹은 결혼 이전에 원가족에 속해 있거나, 1인 가족인 상태에서 할 고민들을 우리는 먼저, 또는 생략하고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게의 고민-이라는 것은 고민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사소하고 세속적이기까지 한 것들인데, 오히려 사회적으로 혹은 가족 내에서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관계를 공인받게 되면 그런 “세속적인” 문제들에 휩싸여 더 진지한 고민은 할 수 없게 될 것만 같은 노파심에 더 주저하게 되는 것도 있다. 마흔이 될랑 말랑한 나이에 쓸데없는 고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생, 시간낭비 하더라도 내가 아는 걸 해야지. 잘 모르는 걸 불안해서 하고 싶지는 않은, 이건 내 성격이다.
오늘 글은 그 ‘세속적인’ 고민들이 뭔지 말 그대로 ‘단상’들을 적어보려고 했는데, 또 프롤로그가 된 것 같다. 프롤로그만 몇 회째 쓰고 있는 것이, 꼭 결혼은 못 하겠고, 고민만 하고 있는 내 상태랑 똑같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지금은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준비할 체력도 없다. 어디까지 프롤로그를 쓰는지 보자, 그리고 다음에는 비가 와도 나가게 만드는 우리의 강아지, 1인 가구를 단숨에 3명 가족으로 만든 강아지 보리에 대한 얘기를 써야겠다. 원래는 이번 주에 썼어야 할 이야기, 제주 동거 생활의 과거와 현재이며 미래일 보리 The d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