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값도 못 내는데 무슨 결혼
이제 마흔인데 이런 고민 괜찮아?
어제 뒷집 삼춘이 또 공방에 오셔서 너희는 결혼하면 제주에서 할 거냐, 서울에서 할 거냐 물으셨다.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은 해 보긴 했지만 우리는 결혼을 주제로 잘 이야기 나누지 않는다. 아마 내가 초반에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내비쳐서 서로 그 주제를 피하게 된 것도 있고, 아무튼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주제가 껄끄러운 것이 된 것은 사실이다.
프로포즈를 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은 대게 설레고 아름다운 것 같던데, 우리는 왜 그게 안 될까? 전에 얘기한 것처럼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걸까.
우리는 돈이 없다. 내일은 내 생일이고, 나는 생일에 케이크를 꼭 먹고 싶은데, 케이크 주문을 놓쳤고, 프랜차이즈 빵집의 케이크는 사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서 파는 케이크가 꼭 프랜차이즈에서 파는 것보다 맛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가능하다면 특별한 날엔(특별한 날에 케이크를 먹으니까) 개인 빵집이나, 카페에서 케이크를 주문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곳은 주로 2-3일 전에 홀케이크 주문을 마감한다. 주문할 수 있는 케이크는 6만원을 훌쩍 넘는 것이었다. 보늬밤이 들어가서 더 비싼 것일지도 몰랐다. 작은 사이즈 케이크가 주문이 안 돼서 크기 때문에도 더 가격이 올라갔다. 네 사람이 모이는 자리가 예정되어 있으니 2호 케이크가 크게 부담되는 건 아니고, 5만 원 이상이 될 거란 건 예상했지만, 6만 원이 넘는 숫자는 좀 부담됐다. 선뜻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짝꿍에게 전화를 했는데, 고민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가격에 너무 놀라며 나보고 결정하라는 말이 서운했다. 나도 거의 70,000원이나 되는 케이크를 사는 게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우리 상황까지 얘기하며 너무 부담스러운 케이크 아니냐고, 그 케잌이 꼭 먹고 싶으냐고 하는 말에는 기분이 상했다.
홀케이크를 예약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땐, 적당한 카페에서 맛있는 조각케이크를 사서 모인 사람들과 나눠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여러 가지 메뉴를 준비해 저녁을 먹을 계획이고, 배부른 상태에서 많이 먹지도 못할 테니.. 케잌이야 기분을 내고 초를 꽃으려고, 그리고 말 그대로 디저트 용도 아닌가. 하지만 케이크가 너무 비싸서 못 산다고 생각하니 케이크가 없는 생일상에 크게 아쉬움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 기분을 생각하며 케이크를 주문하기엔 솔직히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의 케이크였고, 서운한 감정은 점점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졌다.
오히려 돈이 많고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케이크를 알아서 예약해두지 않은 짝꿍에게 서운했을망정 케이크가 비싸서 고민하는 상황이 서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 몇 달 돈이 없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생일에 명품백 같은 것도 아니고, 케이크가 비싸서 고민한다는 게 갑자기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결혼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대체 무슨 글을 쓴단 말인가. 당장 이번달 카드값 내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지난번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결혼인지 결혼식인지 고민하다가 결론을 못 냈는데, 결혼식이라고 해 보자. 결혼식 할 돈도 없고, 준비도 안 되어 있다고 하면 하나같이 무슨 준비를 하냐고 한다. 집도 같이 살고 있는데 식만 올리면 되는걸.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동네 삼춘들도 그렇고. 그런데 정말 뭐 준비할 것도 없이 그냥 하면 되는 것인가?
결혼식을 두고 얘기하면 나는 그냥 적당한 예식장에서 적당한 예복을 입고 남들 눈에 적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꼭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거라면 진작 해치우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야말로 결혼식에 대해 가진 로망이 너무 많아서 결혼식을 해치우듯 하고 싶지는 않은 것 아닐까. 비싸고 화려한 결혼식은 아니더라도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하고 싶은데, 그걸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들에 타협해 가며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준비가 안 됐으니 결혼을 안 하고 싶다고 하면 될 걸, 경제적으로 좀 더 조건이 갖춰진 다음에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면 될 걸, 왜 어른들의 결혼하라는 말은 가볍게 넘길 수가 없는가. 동거 3년이 넘으면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안 할 이유가 없으면 해야 하는 것일까?
돈이 없어서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꼭 내 결혼식이 기대만큼 아름답지 못하고 초라할까 봐 걱정되기 때문만은 아니다.(그리고 그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유일하게 가진 기득권이 ‘이성애자’라는 것. 어쩌면 경제력, 학력, 외적 자산 등 어느 것도 주류에 속하지 못한 나의 허접한 자격지심 때문에 내가 단 하나 가진 기득권을 당연하게 유용하는 것이 왠지 나는 부끄럽게 느껴졌다.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당연한 게 아닌데도 마치 그런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는 왠지 반항심이 인다.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한다는 것, 집이 없어 아이를 못 낳는다는 것은 어른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그냥 해서 되는’ 문제는 더 이상 아니다. 나 한 사람, 나와 짝꿍 두 사람의 일로 볼 때는 더 늦기 전에 결혼이라는 걸 해서 남들 앞에 떳떳하게 부부로 서고, 아이도 낳고 ‘정상’인 가구를 이루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거 문제’가 우리의 문제고, ‘소상공인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며, ‘청년 실업’, ‘청년 대출’ 문제가 우리 문제다. 그런 문제들을 얘기하지 않고 결혼, 출산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있는 현실인 것 같다.
나의 개인적인 일, 개인이 해결해야 할 상황 또는 문제를 거시적인 담론으로 덮으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찜찜함도 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문제를 놓고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지, 결혼하지 않고도 제법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야 할 것 같다.
원래 이번 화의 목차는‘전세는 안돼’였다. 같이 살 집을 구하겠다는 나에게 아빠가 왜 네가 대출까지 해서 전셋집을 구하냐고 했던 것, 사는 곳을 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게감 있는 결정이라는 것. 두 번째 말은 당시에 했던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이었고, 첫 번째 말은 아빠로서도 돌려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관습과 관념들이 많이 있다. 이성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성적으로 서운해지는 상황과 일들. 생일 케이크 같은 것도 그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적으면 또 자기반성과 결심이 이어지는 글이 될 테니 여기까지 적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