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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법은 조변 Sep 16. 2023

탁월한 내용이 중요한가? 세련된 표현이 중요한가?

변호사도 탁월한 내용을 세련된 표현으로 전달하는 시대가 되었다.

(상황 1) 변호사님, 잠깐만요. 파워포인트에 빠른실행모음 설치해 드릴게요. 이거 쓰면 훨씬 빨라집니다.

(상황 2) 변호사님, PPT 슬라이드마다 글자가 너무 많아요. 심플하게 결론과 근거만 남기고 지워주세요.

(상황 3) 변호사님, 엑셀 작업하면서 같은 단순 작업을 5분 이상 하고 있으면 다른 방법이 있는 겁니다.  

(상황 4) 변호사님. 혹시... VLOOKUP 함수 모르세요? 아니... 그것을 일일이 그렇게 세고 계셨어요?

(상황 5) 변호사님, 피벗테이블 모르세요? 피벗테이블 돌려서 데이터 뽑아내면 5분이면 끝나는 일인데...



법률용어 중에 ‘변론주의’라는 것이 있다. 민사소송에서 당사자에게 권리에 관한 주요 사실을 주장하고 증거 등 자료를 수집하여 제출할 책임이 있고, 당사자가 수집하여 변론에서 제출한 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는 원칙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민사소송에서 원고나 피고는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그 근거를 제출해야 하고, 판사는 제출한 자료를 모두 살펴보고 판결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송무변호사는 분량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법리상 필요한 만큼 충분히 자세히 쓰는 경우도 있고, 고객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아내는 서면을 쓰기도 한다. 충실한 내용으로 유리한 판결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준비서면의 분량이 수십 쪽에 달하기도 한다(오죽했으면, 2016년 8월 1일에 신설된 민사소송규칙 제69조의4 제1항에서 준비서면의 분량 30쪽으로 제한하게 되었다). 판사는 변론을 종결하기 전까지 제출된 모든 서면과 증거를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판사는 제출된 자료가 많다는 이유로 대~충 보고 넘어갈 수 없다.      


일반적으로 변호사는 세련된 표현보다는 탁월한 내용을 더 챙긴다. 표현이 다소 투박하더라도 내용상 주장과 증거가 구체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선호한다. 유효한 공격ㆍ방어가 되기 위함이다. 그런데 복잡한 사건의 경우에는 판사님께서 요약 발표를 권유하실 때가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편 변호사가 갑자기 괜히 PPT 변론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나는 PPT 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변호사가 몇이나 될까. 변호사에게 파워포인트 작성과 세련된 발표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솔직히, 발표는 참으로 불공평하다. 발표자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주지만, 청중에게는 그만한 편안함을 준다. 발표자가 열심히 준비한 만큼 청중은 잘 이해한다. 그래서 질문이 많다면, 성공한 발표이다. 변호사는 송무 외에도 내부보고나 법률교육을 할 때도 PPT 발표를 자주 한다. 수많은 명배우들이 영화와 드라마에서 변호사로 훌륭한 언변을 연기하였기 때문에, 다들 변호사는 말도 잘하고 발표도 잘할 것이라 생각한다.

      

변호사가 어떤 자리에서 ‘발표’를 한다면, 그 발표의 디테일을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PPT 작성은 가장 나중이다. 몇 분 동안 발표하는지, 청중은 어떻게 되는지, 별도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는지 등을 먼저 챙겨야 한다. 나는 2분에 1장 정도로 PPT를 작성한다(50분이면 본문 기준 25장 내외). 슬라이드 1장에는 1개의 메시지를 담는다. 대법원 판례 소개를 하면서 하급심 판단과 사실관계를 함께 담으면 대략 25장 내외가 되었던 것 같다(이와 달리, 소송에서 변론 PPT 분량은 해당 서면의 주장과 증거의 양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청중이 가장 실망하는 발표는 '빠른 속도로 빽빽한 본문을 읽기만 하다가 끝에 가서는 휘리릭 넘어가 버리는 발표'다. 그래서 넘지 말아야 할 분량 상한을 정하고, 그 기준에 맞게 내용과 깊이를 구성한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분량을 맞출 수 없을 것 같다면, 주관 부처와 사전 협의를 하여 발표 일정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 이후에 파워포인트로 발표안을 작성한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마무리할지 '스토리'를 짜야한다. 청중에게 익숙한 소재(언론보도, 영화, 드라마 등)나 코믹한 에피소드로 시작하면, 그다음도 편안하게 진행할 수 있다. 발표자는 가급적 슬라이드의 주요 내용을 암기하여야 한다. 모두가 스티브 잡스가 될 수는 없지만, 청중의 기대치는 생각보다 높다. 발표안을 보고 읽기 시작하면, 깊은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련된 표현을 위하여 파워포인트를 잘 익혀둘 필요가 있다면, 탁월한 내용을 위하여 엑셀을 잘 익혀둘 필요가 있다. 조세사건, 금융사건 등 구체적인 숫자가 쟁점이 되는 소송에서 서면 본문에 엑셀로 계산된 표가 자주 들어간다. 직접 엑셀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가 계산한 결과 값을 엑셀로 검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엑셀의 도표를 그래프로 나타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Chat GPT가 나오기 전까지 나에게 '엑셀'이 가장 똑똑한 프로그램이었다. 엑셀은 수많은 기능을 제공하지만, 실무적으로 자주 활용했던 기능은 '필터', '피벗테이블', '조건부서식' 정도이고, 함수는 'VLOOKUP', 'COUNTA' 정도였다. 'F2'키를 통해 해당 셀의 계산과정을 따라가는 것도 자주 쓴다. 변호사라도 이 정도는 익혀두고 필요할 때 잘 써먹을 필요가 있다.   


또한, 사내변호사는 법률자문내역 등 자신의 실적을 엑셀로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상담일자, 자문내역, 요청부서, 요청자, 자문형태(서면, 구두) 등을 작성하여 자신의 실적을 관리하면, 연봉협상 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작년에 비해 올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했는지, 어떤 부서에서 자문요청을 특히 많이 했는지, 본인이 조직에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깔끔하게 도표와 그래프로 보여줄 수 있다.


도입부에서 소개한 사례는 컨설팅펌에서 일하면서 직접 겪은 것이다. 무척 부끄러운 상황을 겪고 나서야 더 배우고 찾아보게 되었다. 변호사는 법률전문가이지, 엑셀과 파워포인트에 면죄부를 가진 자가 아니었다. 탁월한 내용을 위하여 '엑셀'을, 세련된 표현을 위하여 '파워포인트'를 미리 익혀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발표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고객을 위하여 때로는 명품 연기를 해내야 한다.  



1. 변호사에게도 파워포인트 작성과 세련된 발표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2. 조세사건, 금융사건 등의 소송 사건을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엑셀을 잘 익혀둘 필요가 있다. 

3. 사내변호사는 법률자문내역 등 자신의 실적을 엑셀로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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