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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법은 조변 Oct 30. 2023

나만 몰랐던 민법의 '진짜' 나이

행정기본법은 신축 아파트인 반면, 민법은 '120년' 넘은 기와집 고택

     (아래 본문은 외 필요가 없습니다. 편보세요.)


[좌] 세종시 나릿재마을 3단지  /  [우] 전주한옥마을(https://hanok.jeonju.go.kr/)


건축물의 나이를 확인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건축물대장에서 사용승인일또는 준공일을 확인하여 그 때부터 나이를 계산하면 됩니다. 건축물대장은 그 건물 주소만 알면 정부24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령의 '나이'를 확인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까? 법령은 '제정'된 이후 '시행'될 때부터 효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법령은 '시행일'부터 나이를 먹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법령마다 '연혁' 메뉴를 통하여 최초 시행일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정기본법은 2021년 3월 23일 제정되어 그날 바로 시행되었습니다. 주택으로 보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아파트'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축아파트처럼 행정기본법은 최근의 트렌드가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국회나 정부에서는 법률의 제정안을 마련할 때 '총칙' - '본칙' - '보칙' - '부칙'의 순서로 제정안을 마련합니다. 행정기본법은 제1조는 목적 조문, 제2조는 정의 조문 등의 순서로 정형화된 트렌드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법은 훨씬 나이가 많습니다. 민법은 1958년 2월 22일 제정되어, 1960년 1월 1일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 11월을 기준으로 보면 80년을 훌쩍 넘긴 오래된 법률입니다. 보통은 좀 오래된 법이라면 중간에 '전부개정'을 하면서 '리모델링(또는 대수선)'과 같은 것을 하기도 하는데, 민법은 전부개정도 없이 80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특히, 민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요즘처럼 법령을 만드는 가이드라인(법제처 법령입안ㆍ심사기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1조가 '목적' 조문이 아니고, 제2조가 '정의' 조문이 아닙니다. 이렇게만 보면 민법은 80년을 넘긴 주택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민법의 진짜 나이는 100살을 훌쩍 넘깁니다. 아래 표를 보시죠.



지금 우리가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는 민법의 뿌리는 1804년에 제정된 프랑스 민법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민법 제544조에서 소유권의 개념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1888년 제출된 독일민법 제1초안 제848조에도 유사한 내용이 담깁니다.


한편 일본 정부(당시 메이지정부)는 근대적 국가건설의 방향을 수립하기 위하여 1871년 11월에 정부수뇌부의 절반 정도로 구성된 사절단을 서양에 파견하였고, 이와꾸라 토모리, 이또 히로부미 등 100여 명의 일행은 13개월에 걸쳐 미국, 영국, 독일 등 12개국을 시찰하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일본은 서양문물과 제도를 조사하게 됩니다.*


일본민법은 프랑스민법(1804년), 독일민법 제1초안(1890년) 및 제2초안(1895년), 스페인민법(1899년), 취리히민법(1855년), 이탈리아민법(1865년) 등을 참조하였고, 특히 독일민법 제1초안과 프랑스민법을 많이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메이지시대의 소유권 사상에 관한 연구, 김성욱,  경북대학교 법학연구원, 법학논고 제31집, 2009. 10.



일본정부는 1896년 민법총칙편, 물권편, 채권편을 먼저 공포하였고, 1898년에 친족편과 상속편을 공포한 후 같은 해인 1898년에 모두 시행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1912년 조선민사령 제1조에 의하여 기존 대한제국 영토에 일본민법이 시행되게 됩니다. 일본의 민법을 하위법령에 따라 기존 대한제국 영토에 적용하였다고 하여 '의용하였다'라고 하고, 그 일본민법을 '의용민법'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법률이 아니라 한 단계 아래인 조선총독부제령(현행 시행령과 비슷한 정도의 지위)에 따라 의용하게 됨


일본민법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도 여러 정치적인 이유(미군정의 신탁통치 등)로 1959년까지 시행되었다가, 1960년 1월 1일 한국의 민법이 시행되면서 부칙 제1조에서 의용민법을 폐지하게 됩니다. 이때 제정된 민법이 큰 변화 없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1960년 시행된 한국 민법은 일제대부터 적용되어 오던, 당시의 현행법인 의용민법을 기초로 하여 편찬되었다는 것입니다(법학계의 일치된 견해임)***.

***한국민법에 있어서 일본민법의 영향과 역사적 과제, 박인환, 법학논집 제20권 제3호, 2016. 1.


요약하면, 현재 시행 중인 민법의 주요 내용은 1898년 시행된 일본민법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법의 진짜 나이는 120세를 훌쩍 넘기게 됩니다. 민법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1898년 덕수궁에 전화기를 설치하던 시절의 민법 규정을 지금도 읽고 적용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민법은 의용민법과 그 이전의 프랑스민법, 독일민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혁명을 통해 시민이 갖게 된 권리와 제도이므로,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개념과 제도(점유권, 상린관계 등)도 있습니다.


벽괘형 자석식 전화기 5종 (1800년대 말~1900년대). (KT 원주연수원 통신사료관)


공간적으로만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이질감도 상당합니다. 120년 전 덕수궁에 최초의 상용전화기가 설치될 때 일본에서는 민법을 시행했습니다. 각자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현시점에서, 최초의 상용전화기가 설치되던 그때의 일본민법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이질감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민법(특히 물권법)의 주요 내용은 농업(농사)을 중심으로 조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연유수의 승수의무와 권리(제221조), 언***의 설치 및 이용권(제230조), 공유하천용수권(제231조) 등이 대표적입니다. 농지와 농업용수는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인프라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조문은 상당히 구체적인 반면, 공업 또는 서비스업을 위한 조문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쉽게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언: '언덕'의 옛말, '둑'의 옛말 (출처: 우리말샘)


우리 머리가 나빠서 민법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라 당연히 어려운 것입니다. 


어쩌면 다행이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예전에 만든 법을, 우리가 만들지 않은 법을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다행이기도 하지만, 주권자로서 답답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민법 전부개정"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현행 민법을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여러 역사적인 맥락이 있었지만, 현재의 재산권 제도와 가족제도는 현행 민법의 토대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100여 년 넘게 굳어져 온 제도라 급진적으로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기도 합니다. 일단 민법을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바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족) 근 발행한 브런치북을 소개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civil-law

https://brunch.co.kr/brunchbook/lawschool


이전 01화 '나만 몰랐던 민법'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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