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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법은 조변 Nov 13. 2023

나만 몰랐던 민법의 "은밀한 특징"

우리의 민법은 착하고 순한 법률이지만 때로는 아주 답답한 법률입니다.

지난 글에서는 나만 몰랐던 민법의 '맛'을 살펴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나만 몰랐던 민법의 '은밀한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중 개별 법률의 자세한 내용은 넘어가셔도 됩니다.)


'은밀한 특징'이라고 한 이유는...

다른 법률에는 없는 민법만이 가지는 특별한 특징이 있습니다.

국회에서 의결하여 정부가 공표하고 시행하는 법률이 1,500개가 넘게 있지만,

민법만이 가지고 있는 그러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아서 유명하지 않은 '은밀한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은밀한 특징'도 있습니다.


1. 민법은 아주 착하고 순한 법률입니다. 그래서 양보를 잘합니다.  



앞의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법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조문은 1,000개가 넘습니다.

1,000개 이상의 조문을 갖고 있는 법률은 민법이 유일합니다.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법, 가족법은 각기 다른 법리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크고 복잡하다는 말이죠.


흔히 민법이 가장 중요한 법률이라고 하는데, 실생활에서는 민법의 모습을 자주 보기 어렵습니다.

중요하다고 하는데 잘 보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민법은 양보를 아주 잘하는 착하디 착한 순하디 순한 법률이기 때문입니다. 민법보다 착한 법률은 없습니다.

민법은 다른 법률과의 경쟁에서 앞서 가지 않습니다. 다른 법률에게 양보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착하고 순해서, 다른 법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 있다면 민법이 슬쩍 보완해 줍니다.

그래서 민법은 실무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역을 다른 법률에게 양보합니다.


민법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는 고객은 속이 터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착하디 착하고 순하디 순한 민법이 어떻게 양보를 하는지 살펴볼까요?



2. 민법은 '일반법'이기 때문에 양보를 잘합니다. 겹치는 영역에서 양보를 합니다.



민법 제379조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이자율을 정하고 있습니다. 금전거래를 하면서 이자율에 대해 특별히 약속한 것이 없고, 또 다 법률에도 규정이 없다면 연 5%로 계산하겠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100만원을 빌려주고 이자율에 대하여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1년 후에 105만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법 제54조에 따라 '상거래를 하는 사업자(상인)'는 금전거래를 하거나 거래대금을 지급할 때, 연 5%가 아니라 연 6%의 이자를 지급하여야 합니다. 사업자들은 딸려 있는 근로자와 식구들이 많으니 1% 더 비싸게 이자를 발생하게 하여 빨리빨리 돈을 갚고 지급하라는 정책적 배경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영역에서는 연 5%의 이자율이 적용되지만, 상거래를 하는 사업자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착하고 순한 민법은 상법에 그 역할을 양보합니다. 민법이 커버하는 영역 중에서 특정 영역을 다른 법률이 커버한다면 민법은 그 영역을 포기하고 그 다른 법률에 양보하는 것이죠.


순위가 밀리는 법을 일반법이라 하고, 1순위로 적용하는 법을 특별법이라 합니다. 

이 개념은 매우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모르면 손해!).

변호사와 검사와 판사가 흔히 고민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어떠한 사안에는 여러 법률이 경쟁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법률(=특별법)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법률가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실무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많이 어려워지기도 하지만, 컨셉 그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양보를 많이 하는 법이 '민법'이기 때문에, '민법'의 조문은 대부분 일반법적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민법보다 더 후순위에 놓이는 법률은 없습니다. 가장 후순위에서 버티고 있는 법률이 민법이라는 얘기입니다.


 

3. 민법은 마지막까지 잘 버텨주는 버팀목이 되는 법률입니다.



이제 민법이 가장 후순위에서 버티고 서 있는 법률이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특수한 정책을 만들어서 법률을 설계할 때 민법에 있는 내용을 똑같이 복사해서 붙여넣기 할 필요가 있을까요? 특별법은 '포스트잇'과 같은 역할을 하므로, 그 특별한 내용만 민법을 가리면 됩니다. 


특별법에는 딱 필요한 내용만 규정하고 나면, 나머지 배경이 되는 내용은 민법으로 돌아가서 확인하면 됩니다. 애초에 특별법에 양보하지 않은 영역은 민법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지요. 1894년에 종이법전을 찍어낼 때 매우 필요했던 컨셉입니다. 같은 내용을 법률마다 규정하면, 종이법전이 매우 두껍고 무겁게 되는 것이죠.


지금도 그 컨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식한 말로 '입법경제적이다'라고 합니다. 150개 정도 되는 법률에서는 아예 구체적으로 민법의 어떤 부분으로 돌아가라는 안내판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민법의 준용', '민법과의 관계'에 관한 조문입니다.


국립대학병원 설치법에서는 국립대학병원(전남대병원, 경북대병원, 충남대병원 등)의 설립, 운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면서, 보다 기본적인 사항은 제24조에서 민법 중 재단법인(민법총칙)에 관한 사항을 준용하라고 안내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세기본법에서는 제25조의2에서는 세금 납부를 함께 해야 하는 여러 사람의 관계와 범위를 직접 규정하지 않고 민법의 연대채무(채권법)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라고 안내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내입양에 관한 특별법 제9조는 더 확실하게 이 법에서 규정한 사항을 빼고는 민법으로 돌아가라고 안내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를 하면, 대부분의 민사적인 문제의 종착역은 민법이 됩니다. 민법까지 가지 않을 때도 있지만, 파고 파고 들어가다 보면 민법까지 들어가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원고는 "민법"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 피고는 "민법"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판사는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고민을 하는 것이지요. 민법 전에서 멈출지, 민법까지 갈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4. 민법이 착하고 순해서 그런지 가끔은 답답해서 속 터질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배우자(또는 애인)는 착한가요? 순한가요? 착한 남편, 순한 남친이 마음에 쏙 드시나요?

그런데 말입니다. 착하고 순한 성격이 가끔은 속 터지게도 합니다(제가 그런 성격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민법도 가끔은 답답해서 속 터질 때가 있습니다. 착해서 순해서 그런지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민법은 "당연한 것(원칙)"을 다들 잘 알 것이라 착각하고 너무 간단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당연한 것(원칙)"을 조문에서 과감히 생각하기도 합니다.  


민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속이 터집니다. 1000개가 넘는 조문을 공부하기도 벅차고 힘든데, "당연한 것(원칙)"을 따로 공부를 한 후에야 1000개가 넘는 조문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법률'을 만들 때 "당연한 것(원칙)"도 비교적 자세하게 규정을 한 후, "예외적인 것"도 자세하게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제1항"에서 "원칙"을 자세히 규정하고 난 후, "제2항"에서 예외를 자세히 규정합니다. 중요하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은 '제2조(정의)' 조문에서 따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민법은 120세가 넘어서 그렇지 못합니다. 민법 제3조에서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외적인 규정인 '미성년자'에 대한 규정, '부재자(실종자)'에 대한 규정, '법인'에 대한 규정은 반대로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민법 조문만 봐서는 민법의 전체 영역을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어쩔 수 없이, 민법 교과서를 읽어야 합니다.


민법에는 위와 같은 답답한 조문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문에서 드러내지 않고 있는 "당연한 것(원칙)"을 이해한 후, 조문의 각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 답답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은 이러한 민법의 답답한 사정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은 민법의 "은밀한 특징"에 관하여 살펴봤습니다. 이번 글에서 언급한 민법 각 조문의 내용을 세세히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 차차 자세히 살펴볼 것이니, 가볍게 넘어가셔도 괜찮습니다. 오늘도 민법의 '느낌'이 중요합니다.


"민법은 착하고 순해서 양보를 잘한다. 그리고 민법이 답답하고 속 터질 때도 있다."


이 정도의 느낌을 잘 정리해 놓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근 발행한 브런치북을 소개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civil-law

https://brunch.co.kr/brunchbook/law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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