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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균의 코드블랙 Jan 03. 2024

더 열심히 살았더니 더 불행해지길래 달리기를 시작했다

브런치북 연재로 선보이는 ‘소소한데 우주적인’은 매주 수요일 오후 가장 피곤하고 나른한 시간에 배달됩니다. 더 힘을 빼고 사소하되 어쩌면 우주적인 통찰이 있을지도 모르는 칼럼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의학기자라는 본업에 걸맞게 스며들게 보건의료에 대한 이야기도 담길 겁니다.

                

덴마크에서 들은 이야기. 그곳의 청소년들은 고등학교와 대학 진학 전 각각 두 번의 ‘쉼표’가 주어진단다. 각각 일 년씩 총 2년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학업이 아닌 인생 공부를 하는 시간이다. 첫 번째 일 년은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이고, 뒤는 대학진학이 인생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지를 결정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설마 정말 이럴까 싶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선행학습도 모자라 복습까지 학원들을 뺑뺑이 도는 우리나라의 아이들과는 딴판. 부러웠다.  


너무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그네들의 삶이 우리의 기질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부러웠다. 인정받기 위해 죽도록 경쟁하고 죽을 둥 살 둥 살아남아야만 하는, ‘열심’이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삶이란 어쩌면 불행에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지난해 회사에서 어쩌다 조그마한 직책 하나를 맡게 되어 종종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직장 내 인간관계나 업무의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열심히 살다 불행해지고, 그러다 아예 길을 잃을까 두려운 후배들에게 ‘고생 많다. 한 잔 해’라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힘들수록 바짝 엎드려 재깍재깍 나오는 월급이나 받으며 어려운 시절을 버티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낙관이나, 옛날이 좋았다는 술주정이나, 요즘 MZ 직원들은 인내심이 없다는 힐난 따위 대신 나는 적어도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전해주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러다 깨달았다. 나도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도 버거울 정도로 말이다. 남의 상처를 듣다 보니 나도 그들만큼 상처투성이라는 걸 깨닫고 만 것이다.    

  

노인과 아이, 2023 ⓒKim Yangkyun

이후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시작이야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풀다 보니 건강에 이상이 생겨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운동화와 옷차림, 그저 뛰기만 하면 되니 단출하다 싶었다. 그렇게 퇴근 후나 주말 아침마다 집 앞 공원을 달렸다.     


숨이 차 뛰다 서다를 반복하기 여러 번. 즈음에 담배를 끊고 근력 운동을 겸하자 점차 뛸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났다. 봄부터 뛰기 시작한 것이 여름과 가을을 거쳐 겨울까지 이어졌다.     


달리기가 좋았던 이유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뛰다 보면 사방은 조용해지고 거친 숨소리와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그 고요하고 건강한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몸이 익숙해지자 욕망도 자라났다. 더 뛰기 좋은 코스에서 뛰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공원 트랙에서 산 둘레길로 코스를 바꿨다. 아름다운 풍경, 나무와 풀, 꽃 냄새가 좋았다. 단순해 보여 시작한 운동이건만 욕망은 계속 커졌다. 더 좋은 운동화를 갖고 싶고, 기능이 많은 운동복도 사고 싶었다. 하다 하다 장갑에, 스마트폰을 보관할 포켓까지 구매하고 나서도 성에 차질 않아 다른 러너의 ‘장비’를 흘깃댔다. 하여간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다. 

 

뛰다 보면 멀리 오르막길이 보일 때가 더 힘들다. 오르막을 벗어나기 직전 정상에 다다르기 이전은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런데 내리막에 이르면 힘든 건 줄어들지만 무릎이 시큰거렸다. 그럴 때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편안하다고 정신을 놓으면 부상이 생길 수 있다. 무리를 하다 찜질에, 파스와 진통제에, 병원 신세까지 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트랙이든 둘레길이든 숨이 차고 힘든 건 똑같지만, 그래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야 더 뛰는 맛이 난다. 오르막을 달릴 때는 포기하지 않도록 속도를 줄이면 도움이 됐다. 내리막도 보폭을 좁히고 속도를 줄여 무릎의 부담을 줄이니 할 만했다.     


사실 길은 그대로이고 러너는 그 길 위를 달리다 서다를 반복할 뿐이다. 남의 것을 질투해 보아도 뛰고 나면 다 똑같았다. 그랬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힘든 일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데, 너무 힘든 순간이 왔다면 이제는 괜찮아진다는 신호일 수 있었다.     


그래서 알았다. 달리기가 내 삶과 닮았단 것을.      


욕망과 상처는 나를 옭아매는 그물로, 때로는 바늘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더는 남의 일에 기쁨이나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데. 누군가를 공감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욕망이 들끓는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좌절하는 일은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어도 반복될 것이니 즐거움보다 답답함이 더욱 컸다.    

  

그럴 때면 달렸다. 달리기가 삶과 닮은 이유는 또 있었다. 더러 주저앉고 멈추거나 길을 잃은 기분으로 목표 없이 나아간다고 느낄 때조차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쨌든 계속 달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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