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초이 Sep 23. 2020

뺄셈의 미학

제니 홀저, 알베르토 자코메티

어릴 땐 세상을 살아가는 게 단순하고 간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머릿속에 담아내야 할 것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들은 누군가 이미 닦아내어 놓은 경지 일부였기에 고민은 없었습니다. 

어린 삶에 예속되어 갖고 싶은 것 중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소유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담아낸 많은 것들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지는 태양이 빛을 앗아가듯 영원한 것은 없지만 내 것으로서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든 더 나아가고 싶고, 더 행복해지고 싶고, 더 갖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찹니다. 

고맙게도 그 욕망을 쉽게 성취할 수 있는 우리는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취한 기쁨의 시대는 또 다른 욕망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이것만 가질 수 있다면 부유하고 여유로워질 수 있다고 분망 합니다. 

장 자크 루소는 “욕망은 우리를 자꾸자꾸 끌고 간다.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 우리의 불행은 거기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 끝은 죽음뿐인데 자꾸 도달할 수 없는 너머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삶에는 가져야 할 찰나와 버려야 할 찰나가 옵니다. 우리는 버려야 할 찰나 자체를 부정합니다. 

이 부정들이 욕망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가 와, 언젠가는 불행한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자연은 균형을 이루려 하는데 인간은 원하는 것으로만 넘치게 메우려고 합니다. 들숨과 날숨이 공존하듯,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 우리에게도 공존할 덧셈과 뺄셈이 필요합니다.     


<PROTECT ME FROM WHAT I WANT>,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 1985 / 제니 홀저

사진출처


욕망과 소비로 어지럼 느낀 나에게 무려 30여 년 더 된 문장 한 줄이 경종을 울렸습니다. 

1985년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라는 문구가 걸음을 보채던 뉴요커들을 멈추게 했습니다. 

이 한 문장은 원하는 것이 무덤처럼 쌓여 있는 세상에 잠시 숨 고르며 점철되게 했습니다. 

원하는 것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이게 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면할 수 있는 용기와 도움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 광고 일을 하던 친구의 제안으로 제니 홀저 작가는 한 문장을 쏘아 보내게 됩니다. 그 문장이 바로 “PROTECT ME FROM WHAT I WANT.”였습니다. 

문장이 가진 장소 덕분에 자칫 평범해 보일 법한 말이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오락과 쇼핑이 가득 담긴 화려한 대도시에서 제니 홀저는 나를 지켜달라고 호소합니다. 호소는 곧 소비로 욕망을 채우는 인간들을 환기했습니다. 문장을 작업에 이용하는 제니 홀저 작가는 이미 욕망으로 물들어진 지친 생활을 경고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욕망을 넘어 이제는 과잉의 시대, 광고의 주된 도구였던 전광판에서 공공예술의 빛을 펼친 셈입니다. 

지친 무거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이 과연 지켜졌는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인생에서 나 자신을 지켜온 것은 무엇인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짧은 글 또한 인간에게 영향 끼친 그 순간 굳센 예술이 된다는 것을, 피타고라스는 “많은 단어로 적게 말하지 말고 적은 단어로 많은 것을 말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의미를 관통하는 문장이 내 머릿속에서 벗어나질 않습니다. 아직 남은 생애에 나는 나를 계속 지켜주고 싶습니다.      



<걸어가는 사람>, 1960 / 알베르토 자코메티

사진출처


덜어내는 삶과 예술은 쉽지 않습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덧셈이 아닌 뺄셈을 택했습니다. 인간 형상에 간신히 붙어있는 것만 같은 살점들은 녹아내린 것 같기도 하고 마른 대추 같기도 합니다. 조소는 ‘소조(ⓐ)’와 ‘조각(ⓑ)’ 방법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재료를 조금씩 떼어냈습니다. 마치 살을 꼬집어 떼어내듯 덜어내었습니다. 

뼈 위로 더해진 살점은 껍질에 불과할 뿐이라는 듯, 우리는 이제껏 껍질로서 또 다른 껍질을 가진 존재를 대해 온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인간이 가진 허영, 탐욕, 집착 같은 점들을 한둘씩 떼어낸다고 생각하니 드러난 앙상함에 덧없는 실존, 그 자체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꼬집힌 것처럼 인간은 아프겠지만 한편으론 가볍게 보이기도 합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완성이란 더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는 뺄 게 없을 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더하고만 싶은 삶이 아니라 무엇을 빼야 할지 알았을 때, 그때로부터 나는 실존하며 계제(階梯)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 소조 : 재료를 붙여 입체 형상을 만드는 기법

ⓑ 조각 : 재료를 새기거나 깎아서 입체 형상을 만드는 기법

이전 18화 한국적인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