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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드롱 Sep 29. 2023

뻔뻔하고 행복하다

아침 산책 중에 만난 비둘기들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벌금을 물 수 있습니다.’


볕이 잘 드는 오래된 아파트의 공터에 커다란 플랜카드가 걸렸다. 그 현수막 아래엔 한 30마리쯤 되는 비둘기들이 일과에 열중하고 있다. 사람이 먹이를 주든가 말든가...


어젯밤 내린 비가 커다랗고 훌륭한 공중목욕탕을 만들어줬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갸웃거리며 감상하는 놈, 흙탕물을 튀기며 목욕하는 놈, 콕콕 물 마시고 산책하는 놈, 어깨를 건들대며 데이트 신청하는 놈, 튕기는 놈, 모래알을 쪼아대는 놈 등 각자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며칠 전 일곱 살 어린이가 지나가는 비둘기를 향해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콱 가서 죽여버릴까!’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험악한 말과 무엇보다 그 당당한 분노에 나는 섬뜩 놀랐다. 나와 마주친 눈동자에는 ‘그래도 마땅할 만큼 나쁜 놈이잖아요.’라는 당위가 서려있었다.

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나는 7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88 서울 올림픽의 배경으로 하얗게 날던 평화의 비둘기, 백설공주의 손 위에 앉아 정답게 노래하는 비둘기, 그리고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문 노아의 비둘기, 성령의 모습을 한 비둘기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어느 날 새벽, 대학교 앞 골목의 음식물쓰레기와 토사물에 달려들어 열광적 식사를 하던 비둘기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으로, 순결한 이상이 비참한 현실로, 따뜻한 동화가 심란한 다큐멘터리로 굴러 떨어졌다. 그 몇 초간의 이미지는 잊히지도 않는다.

이후 나는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렸다. 그때 의외의 군식구가 우리 집 에어컨 실외기에서 둥지를 틀었다. 나는 놀부 저리 가랄만큼 매몰찬 집주인이 되었다. 아무리 찬물을 뿌리고 두드리고 쫓아내도 그들은 너무나 뻔뻔스럽게 인내심이 강한, 냄새나고 가난한 세입자였다. 무슨 알은 그렇게 부지런하게도 낳는지, 아기 비둘기들은 휘두르는 빗자루질에도 어깨를 움츠릴 뿐 금세 컸고, 뒤이어 여자 친구를 데려오고 어설픈 둥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차 하는 사이에 푸르스름한 알을 낳았다.   


모질게 미워해도 되는 생명이라는 것이 있나, 때론 인간도 혐오스러워질 때도 있는데. 그러나 짐짓 생명을 존중한다고 생각하는 하는 나도 모순투성이다.

여름밤 모기를 향해 지나칠 만큼 커다란 분노를 표현하며 살의를 번득이는 남편. 그리고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비웃어놓고 욕실에 등장한 지네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나다






아들이 새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춤을 추듯 힘차게 걷던 아들이 저만치 있는 비둘기들을 보자마자 몸이 굳었다.

공생할 수밖에 없는 도시의 비둘기들을 두려워한다면 그냥 길을 걷는 것도 스트레스일텐데. 나는 설득해 보았다. 비둘기들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란다. 소용이 없었다. 무의식적 공포는 의식적 설명으로 극복되지 않았다.


비둘기들을 향해 응징의 발길질을 하는 어린이의 확신이 불편하다. 내가 번민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가. 로봇 만화영화를 보는 아들에게 세상에 완전히 나쁜 놈과 착한 놈 같은 건 없다고, 그렇게 명쾌한 세상이 아니라고 언제 알려주긴 해야 할 텐데 아직 머뭇대고 있다.


비둘기들에 대한 혐오를 가르치는 것도 켕기고 반대로 평화의 새라고 알려주는 것도 꺼림칙하다.

나도 봤으니까. 부패한 음식에 달려드는 뻔뻔한 뒤뚱거림에는 일말의 겸연쩍음도 없었다. 식탐에 희번덕거리는 동그란 눈은 낭만적 동화는커녕 그로테스크했다. 그래도 어린이에게 현실을 다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파스텔 빛 각색이 아직은 필요한 것 아닐까.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모래색 산비둘기 한 마리가 공터 한가운데 혼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산비둘기라는 종류가 원래 그런건지 혼자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이 별로 사교적인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디 아파 보이지도 않는데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고독하게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한참을 앉아 있더니 엉거주춤 일어나 조심스레 마당 가장자리를 걷다가 방해받기도, 방해하기도 싫다는 듯 초록색 나무 사이로 스륵 숨어 들어갔다. '그래, 나도 때론 어둔 방에 혼자 있고 싶어.' 문득 나무속에 숨어든 그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 얼굴은 뻔뻔하지 않아서 좋았다.



순결과 부패, 평화와 아귀다툼, 희망과 절망의 이중적 상징이 된 회색빛 비둘기들. 우르르 눈앞을 날아간다. 이제 몸단장이 끝나고 어디 점심이라도 먹으러 가나보다.


정작 얘네들은 복잡한 게 없는데 나만 오늘도 쓸데없는 생각이 많다.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경 쓰며 시간을 쓰는 일은 도대체 없는 놈들. 사람 따위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든, 흘겨보든 노관심이다. 발길질을 하든지 말든지 본인들은 꾸륵꾸륵 노래한다. 건들거리는 폼이 오히려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건 참 부럽다. 어쨌든 맘 먹으면 솟아오를 수 있는 날개, 그리고 그 백 퍼센트의 뻔뻔함 혹은 당당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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