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변화는 늘 평범한 반복 속에서 시작된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오늘을 견디는 사람의 몫이다."
-'응답하라 1988' 중에서-
결혼 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아파트 뒤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산책 삼아 오르던, 정식 등산로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제법 오르막이 있는 산이었다. 나는 그 산을 엄마와 종종 올랐다. 땀을 흘리며 운동하기보다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둘만의 산책이자 데이트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도 엄마와 함께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50대 정도의 남성분이 눈에 들어왔다. 등산용 스틱을 짚은 채, 마치 아장아장 걷는 아이처럼 느리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리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병을 앓았거나 큰 사고를 겪은 분 같았다. 나는 그분을 잠시 바라봤다. 너무 느리게 걷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묘하게 인상 깊었다. 저런 걸음으로 왜 이 산을 오르실까? 힘들고 지칠 텐데, 그냥 집에 계시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결혼을 했고, 오랜만에 친정에 들러 엄마와 다시 그 산에 올랐다. 예전처럼 걷던 그 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등산용 스틱도 없었고, 절뚝이지도 않았다. 비록 일반인처럼 빠른 걸음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묵직한 발걸음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얼마나 걸렸을까? 분명한 건, 그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나아온 결과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산을 내려오며 그분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면서 내 지난 시간들도 함께 떠올랐다. 임용시험에 합격한 16년 전, 나는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업 중 있었던 일이나, 마음에 남는 아이들의 말, 떠오르는 생각들을 틈날 때마다 메모하듯 적었다. 하루에 수십 장을 쓰지도, 일주일에 한 번 꾸준히 쓴 것도 아니었다. 고3 담임을 맡았던 해에는 1년에 겨우 몇 편만 쓴 적도 있었다. 그저 떠오를 때마다 짧게 적고, 나중에 꺼내 다시 고쳤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주 조금씩 썼을 뿐이었다. 산에서 본 그 남성분의 걸음처럼 말이다.
최근 출판 공모전 문의를 하며 ‘200페이지는 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안 되겠네요. 그 정도는 안 될 거예요.”
그런데 원고를 모아보니 200페이지를 훌쩍 넘었고, 오히려 일부는 덜어내야 할 지경이었다.
비단 글만이 아니었다. 내 아들도 그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언젠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연주해 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정말 ‘끽끽’ 대는 쇠 긁는 소리 같았고,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들에게는 "너무 멋지다"라고 말하며 큰 박수를 쳐주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고, 지금 아들은 스즈키 4권에 나오는 곡 중 하나인 Seitz의 Concerto No.2, 3악장을 멋지게 연주하게 되었다. 친한 선생님 한 분은 아들이 방과 후에서 바이올린을 배운다는 말을 듣고는, “방과 후에서 악기 배우는 거 아니야. 악기는 과외가 좋대”라고 말했지만, 정작 우리 아들은 5년째 같은 교실에서 배우고 있고, 피아노 과외를 받던 선생님의 딸은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은 5학년 중에 바이올린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1학년 때 함께 시작했던 친구들은 다 그만두었지만 아들은 꾸준히 하고 있고, 지금은 딸도 함께 방과 후에서 연주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 딸은 주말 아침에 Bourrée를 연주하며 내 잠을 깨워주는 작은 천사이다.
꾸준함은 그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자란다.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농부 야쿠바 사와도고는 버려진 땅에 씨앗을 심기 시작했고, 수십 년에 걸쳐 척박한 사막을 울창한 숲으로 바꾸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는 하루하루 나무를 심었고, 결국 그 땅은 살아났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거 매일 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어?”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아주 조금씩 나아가더라도, 멈추지 않으면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산에서 만난 그 분은 그걸 증명해 보인 사람이었다.
꾸준함은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화려하지 않아도,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달라진다. 그러니 지금 아주 조금씩이라도 하고 있다면, 그걸 계속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