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는거야, 그냥
나는 여름을 제외한 계절에는 종종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바람이 살짝 옷깃을 스치는 날이면,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동네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일이 제법 괜찮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렇게 하루를 여는 이 시간 덕분에 내가 조금 더 평정심을 유지한 채 일을 시작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길목 어귀, 작은 슈퍼 앞 의자에는 늘 어르신 몇 분이 앉아 계신다. 나는 그 길을 거의 같은 시간에, 거의 같은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분들은 항상 내가 지나가기 전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뭔가 말을 걸듯이, 또는 뭔가를 알아보려는 듯이 얼굴을 찬찬히 훑는다. 가까워지면 그 시선은 더욱 선명하게 나를 관통하고, 지나쳐 가는 순간에도 나는 그 시선이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음을 느낀다.
한 번은 너무도 궁금해서 일부러 뒤를 돌아봤다. 과연, 세 분의 할아버지가 똑같은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인가? 아닐 것이다. 내 옷차림이 이상하지도 않았고, 내가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까? 그건 단지 내 오해일까? 지나치게 예민한 감정일까?
비슷한 일은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서도 있었다. 어느 주말 오후, 아이와 함께 베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나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아이는 배드민턴 셔틀콕을 이리저리 날리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 바로 옆에 있는 벤치에 앉더니 나를 계속 쳐다보기 시작했다. 다른 벤치도 많이 있었는데 굳이 우리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신경쓰여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불쾌했다. 뭔가 관찰당하고 있는 느낌, 나를 평가하고 있는 듯한 시선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무심한 ‘지나가는 시선’과는 달랐다. 보통은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는다. 쓱 한 번 보고, 곧바로 시선을 거두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다. 그런데 왜 어르신들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살아가던 중, 뜻밖의 장소에서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병실에는 나보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이 함께 계셨고, 우리는 종종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내가 병실에 앉아 책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같은 병실 어르신들이 나를 쳐다보고 계신 날들도 많았다. 어느 날, 나는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왜 어르신들은 사람을 오래 쳐다보세요?”
한 어르신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잘 안 보여서 그래. 누가 오는지 보려면 얼굴을 좀 오래 봐야 해. 눈도 귀도 다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을 걸면 누구인지 알고 대답이라도 하려면 얼굴을 좀 보고 있어야 하지.”
또 다른 분은 이렇게 덧붙였다.
“하루가 똑같아. 뭐 재미있는 일도 없고, 티비도 재미없고. 그러다 누가 지나가면 그냥 봐. 진짜 그냥 보는 거야.”
그리고 또 한 분은 말했다.
“젊은 사람이 지나가면 더 봐. 예쁘잖아. 그쪽 젊은 아가씨가 책보는 모습도 예뻐(참고로 나는 두 아이의 엄마라는 걸 이미 말씀드렸는데도 나를 보고 젊은 아가씨라고 하신다). 젊은 남자도, 젊은 여자도 다 예뻐. 그냥 젊음이 다 예뻐 보여.”
그날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불쾌했던 그 시선들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세월의 잔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분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단순한 벤치가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가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창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그 긴 시간을 견디는 방식 중 하나가, 그렇게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슈퍼 앞 그 벤치에 앉을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아침마다 아이들 밥을 차리고 출근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런 바쁨도 사라질 것이다. 아침이 되어도 허기조차 느끼지 않고, 그저 시계만 흘러가는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누군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 누군가가 지나가면, 그냥 쳐다보게 될 것이다. 이유 없이. 아니, 어쩌면 아주 많은 이유를 담고서 말이다.
나는 그날 이후, 출근 길 그 길목을 지나며 조금은 여유 있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고개만 숙였지만, 어느 날은 “안녕하세요”라고 말했고, 또 어떤 날은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웃으며 건넸다. 그러자 어르신들도 조금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짧은 인사 하나에 시간의 골이 잠시 메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건 분명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 시선의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사연과 외로움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불편함을 이해로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대화, 아주 잠깐의 멈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는다. 지금은 누군가의 시선을 불편해하고,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 또한 그런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일, 그리하여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그리고 지금의 그들을 함께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냥 보는거야, 그냥."
그 말 속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쓸쓸함도, 그리움도, 젊음을 향한 애정도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시선을 조금은 따뜻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