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의 기쁨에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질투는 마음의 빈곤이다.
-세네카-
“사람은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진짜야.”
오래전부터 흔히 듣던 말이다. 장례식장, 병원,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 옆에 있어주면 그 사람의 진심을 느끼게 된다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슬픈 자리에 발걸음을 해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런 자리를 함께 해준 기억은 오래간다.
그런데 얼마 전, 전혀 다른 말속에서 나는 더 깊은 울림을 받았다.
“사람들은 누가 힘들 땐 옆에 있어주려고 해. 그런데 정작 내가 잘될 땐,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사람은 정말 드물어.”
가깝고 오래된 친한 언니가 조용히 꺼낸 말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한 사람에게 일이 잘 풀릴 때, 좋은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축하해’라는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어쩐지 전달된다. 표정, 눈빛, 말투, 말의 길이, 주제 전환의 빠르기 같은 것들 속에서, ‘너는 잘되는데 나는 왜 안 되지?’라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도 한다.
실제로 사람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선 비교적 쉽게 반응한다. 위로하면서 동시에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니까’라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힘든 사람에게 공감하면서, 마음 한구석에선 ‘나는 아직 괜찮다’는 감정을 얻는다. 그런데 타인이 좋은 일을 겪을 때는 조금 다르다.
SNS에 올라온 취업 소식, 결혼사진, 합격 소식, 책 출간, 이사, 여행, 새로운 관계… 상대의 기쁨은 곧바로 나의 결핍과 비교된다. “나보다 뒤에 있던 애가 벌써?” “쟤가 뭘 잘했다고 저렇게 축하를 받아?” “좋겠다,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는 일보다, 속으로 한 발 물러나 그 기쁨을 감상자처럼 바라보는 일이 더 익숙해진다. 나 역시 그랬다. 누군가가 너무 잘 되면, 기쁜 마음보다 먼저 올라오는 감정은 ‘부럽다’였다. 때로는 그 부러움이 작고 뾰족한 질투가 되어 마음을 찔렀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삐딱한 생각을 하며, 진심으로 “잘 됐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속이 좁은 사람처럼 느껴졌고, 도무지 그런 감정을 이겨낼 자신이 없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잘되었을 때 누가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주는지를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진심으로 웃어주고 “진짜 잘됐다! 네가 잘 돼서 나도 기분 좋아.”라고 말해준 사람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알게 되었다. 특히 친하게 지내는 동생은 내 아이 둘의 초등학교 입학일마다 아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연필을 선물로 주면서 너무 축하한다는 말을 해 주었는데, 그 마음과 함께 받은 선물은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남의 기쁨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속마음은 다르더라도 겉으로라도 “정말 잘 됐다”라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말에 점점 마음을 담아 보려고 한다. 남의 기쁨 앞에서 침묵하지 말고, 뒤에서 뒷말하지 말며, 누군가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기꺼이 나와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싶다. 이 모든 노력은 단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결국 나도 그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참 짧은 인생이다. 나는 점점 남의 실패에만 박수를 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성공에 진심으로 박수를 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결핍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쁨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심이 아닐 수도 있고 속으로는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 마음을 이겨내고 웃으며 말하고 싶다.
“정말 잘 됐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