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남학생의 손목에 머리끈이 있는 이유
조카의 손목에 언제부턴가 검은색 줄이 보였다. 처음엔 팔찌를 찼나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팔찌가 아니라 머리끈이었다. 내 손목에도 있고, 머리 긴 여성들 대부분의 손목에 하나쯤은 늘 있는 그 검은색 머리끈 말이다. 숏컷 머리의 남자 중학생 손목에 왜 머리끈이 있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요즘은 여자친구가 있다는 표시로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손목에 머리끈을 차고 다닌다고 했다. 열다섯 살인 아이가 머리끈 하나로 자신의 연애 상태를 드러내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물론 그 머리끈의 쓰임은 무척 실용적이다. 여자친구와 음식을 먹다가 머리를 묶어야 할 때 건네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장면을 더 이상 낯설게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 어린 중학생이 여자친구를 배려해 손목에 머리끈을 지니고 다닌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도 시대에 뒤처진 꼰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장면은 대중문화에서도 반복된다. ‘숏박스’라는 유튜브 채널 중 한 영상에서 연인 사이의 남녀가 밥을 먹다가 여자가 배가 아프다며 “생리하려나?”라고 말하자, 남자가 가방에서 생리대와 생리통 약을 꺼내는 장면이 나왔다. 댓글 창에는 남자친구가 원래 이렇게까지 챙기느냐는 반응부터 남자친구 차 안에는 늘 생리대가 있다는 이야기, 자신의 자취방에 여자친구를 위한 생리용품을 준비해 둔다는 경험담까지 이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유난스럽게 여겨졌을 장면이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제 “이것은 여자가 할 일이고, 남자는 왜 그런 걸 하느냐”라는 말은 설 자리를 잃었다. 필라테스를 다니는 한 친구는 특정 시간대에 남자 수강생 두 명이 있는데, 그 공간에서 가장 불편해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이가 많은 자기 자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의 시선은 이미 달라졌는데 개인의 인식만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었다. 젠더의 경계는 이렇게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흐려졌다.
이 변화는 성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이 역시 그렇다. 나는 초등학생 정도되는 아이들이 아이돌로 데뷔하는 모습을 보며 놀란 적이 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짙은 화장을 하고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장면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중학생이 연애를 이야기하고, 중년 이후에도 여행 유튜브를 올리며 새로운 팬층을 만드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표현할지는 더 이상 나이로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의 틀 안에 머무르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이 시대를 설명하기에는 '2025 트렌드 코리아'가 말한 ‘옴니보어’라는 개념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옴니보어는 하나의 취향, 하나의 역할, 하나의 정체성에 자신을 고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를 뜻한다. 인간 역시 이제 단일한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사회는 빨간색 길에는 빨간 옷을 입은 사람만 지나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같은 길 위를 자연스럽게 걷는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파란 옷을 입었든, 노란 옷을 입었든 그 차이는 더 이상 방향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규정보다 선택이 먼저이고, 기준보다 취향이 앞서는 시대다.
중요한 것은 성별이나 나이, 미리 정해진 역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즐기고 어떤 언어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가이다. 그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거나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 시대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너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도 괜찮다고 허락한다. 그 다름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이 세상이 말랑말랑해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