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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선생님 Oct 29. 2020

화장실, 그 비밀스러운 공간

화장실에서 그녀는 무엇을 하는가

                                                                   

  "너는 집 근처 화장실은 다 꿰고 있겠다."

 예전부터 나의 잦은 화장실 출입을 알고 있는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물론 다 꿰고 있다. 내가 종종 다니는 길목의 건물 중 문이 열려 있어 쉽게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으며, 낯선 곳에 가면 맨 처음 확인하는 것도 화장실 위치이다. 술집을 갈 때에는 안주가 맛있다거나, 그곳 '물'이 좋다거나 하는 점보다는 술집 내부에 남녀로 구분된 화장실이 있냐 없냐가 더 중요하다. 맥주를 좋아하지만 방광이 약해서 몇 잔 마시다 보면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난 뒤에는 바로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큰일을 치른다. 가끔이 아니라 거의 그렇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하루에 먹는 끼니만큼 화장실에 가서 중대한 일을 치르기 때문에 나에게 '변비'란 그 느낌조차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단어일 뿐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 근처에 있는 화장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길 바로 건너편 건물 1층에 있는 화장실이다. 그 청결 수준은 물론이거니와 화장실 내부 칸막이가 꽤 넓어서 볼일을 볼 때 옆칸에 않아 있을 누군가를 너무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매너벨도 붙어 있다. 사실, 오래전에 이걸 처음 보았을 때 도대체 이 기계의 용도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었다. 그래서 어느 날 호기심에 버튼을 눌러보았더니  "쏴르르르르" 하는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나왔다. 아마 이걸 생각해 낸 사람은 '어떻게 하면 공중 화장실에서 나의 비밀스러운 소리를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고 편안하게 볼일을 치를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누가 들어도 분명 가짜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기계의 버튼을 누르면서 나의 소리를 감추느니, 그냥 변기에 앉은 채로 힘을 줄 때마다 물을 내리는 게 더 나은 건 분명하다. 하지만 물을 내리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너무나 큰 가스 소리가 났을 때는 숨이 '턱'하고 멎을 정도로 당황스럽다. 그럴 땐 옆 사람이 먼저 나가기만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내가 먼저 후다닥 나가곤 한다. 오래전 이 이야기를 약간 미화시켜서 술자리에서 친한 남자 후배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누나. 옆에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편히 싸!"

라고 말하는 후배에게 너는 잘 여자를 모른다면서, 공중 화장실에서 옆 사람 신경 안 쓰고 뿡뿡거리며 볼일을 보게 된다면 그건 내가 정말 아줌마가 된 거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는 지금 두 아이를 둔 진짜 아줌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엉덩이에 물이 튀는 찜찜함을 감수하면서 열심히 물을 내리며 볼일을 본다.


  반면 내 친언니는 나와 전혀 다르다. 
낯선 곳에 가면 '큰 것'이 아예 나오지 않는단다. 20대 중반에 언니와 단 둘이 3박 4일간 지리산 등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언니는 그 많은 산길을 오르는 것 못지않게 딱딱하게 굳은 아랫배 때문에 고생했고, 나는 쉽게 부글거리는 배를 부여잡느라 고생했다. 저 멀리 산장이 보이면 나는 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린 강아지처럼 달려갔고, 언니는 '이번에도 때가 아닌 것 같아'라는 표정을 짓곤 했다. 내가 기쁨에 가득 차 달려간 산장 옆 화장실은 지금껏 가본 화장실 중에서 가장 최악에 속했다. 화장지로 코를 틀어박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냄새가 지독했는데 그 냄새를 코로 그대로 들이마신다면 엄청난 전염병에 감염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변기는 또 어떠한가. 내가 그것을 변기라 부르는 이유는 변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것이 있어서일 뿐이다. 물을 내릴 필요도 없다. 그냥 변기 아래에 보이는 깊은 동굴 같은 곳에 모여있는 타인들의 배설물 위로 내 것을 턱~쌓아 놓기만 하고 나오면 된다. 나는 결국 화장지를 쥔 한 손으로는 코와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은 허벅지 위에 올려서 힘을 실어주는 가장 이상적인 자세를 찾게 되었다. 왜 허벅지에 힘이 필요하냐면 변기라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물체에 내 피부가 닿지 않게 엉덩이를 공중에 띄워야 했기 때문이다. 화장지 틈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냄새를 엄마가 끓여주신 맛있는 된장국 냄새라고 상상하면서 부들거리는 허벅지와 종아리에 힘을 꽉 주고 모든 에너지를 엉덩이에 집중하는 것은 거의 기예 수준에 가까웠다. 

"나는 절대 안가. 가고 싶어도 안가!"

화장실 문을 발로 밀고 나오는 나를 보고 언니가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언니 맘대로 하라고 대꾸했겠지만 나는 시원하게 볼일을 마친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로 언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거운 짐을 털어버린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화장실 변기가 그 어떤 안락의자보다 편안함을 주었던 나의 20대를 결코 잊을 순 없다. 졸업 후 얻게 된 첫 번째 직장에서 인간관계는 좋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었다. 어느 날 우연히 화장실에서 약 30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그날 저녁까지 '덜 피곤한'채로 일을 끝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화장실 변기 뚜껑 위는 나에게 꿀잠을 위한 최고의 장소가 되었다. 변기에 앉아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휴지걸이에 팔을 올리고 그 팔에 얼굴을 묻고 자는 것은 정말로 '꿀 맛'이었다. 이렇게 달콤한 시간을 갖기 위해 나는 항상 오후 세 시 경이되면 얼굴을 찡그리고 배를 문지르면서 "꼭 성공해"라는 동료들의 격려를 들으며 사무실을 나가곤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부서에서 공식적인 '변비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런 달콤함이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화장실에 붙어있던 작은 스테인리스 휴지걸이가 갑자기 내 얼굴 크기보다 더 큰 플라스틱 롤 휴지걸이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팔을 올릴 수 없게 된 나는 궁여지책으로 변기 뒤에 바짝 앉아 등을 기대어 자 보려고도 했지만 도대체가 영 불편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거꾸로 앉아서 변기통을 껴안은 채로 위쪽에 머리를 기대도 봤지만 자세가 영 나오지 않았다. 발을 한쪽으로 모아 앉아도 보고, 뚜껑 위에 요가 자세로 양 발을 다 올려도 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렇게 달콤했던 나의 낮잠시간은 사라졌고, 아직도 나는 롤 휴지걸이가 맘에 들지 않는다.


  지금은 몸이 피곤할 때면 교사용 휴게실에 있는 안마의자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곤 한다. 최적의 각도로 몸을 뒤로 눕힌 채로 '뚝따다다~'소리를 내며 열심히 내 등을 두드려주는 안마의자에 몸을 맡길 때면 나는, 오래전 20대 때의 첫 직장에서 즐겼던 화장실 낮잠시간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의 안마의자가 주는 편안함은 그 당시 화장실 변기와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인 건 확실하지만 그때의 변기 뚜껑 위에 앉아서 꿀잠을 자곤 했던 모습이 그리워지는 건 어째서일까...



                                                               신은 죽었다.

                                                                  -니체-

                                                               너는 죽었다.

                                                                    -신-

                                                          너희 둘 다 죽었다!

                                                            -화장실 청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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