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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선생님 Oct 05. 2022

나이가 들면 왜 설명서가 보기 싫어 질까

해보려고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는거 아니겠는가


                                           나이 듦은 잃어버린 젊음이 아니라

                                    기회와 강인함으로 가는 새로운 단계를 말한다.

                                                           -Betty Friedan-



  얼마 전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후배를 만났는데 온라인 수업과 관련해서 너무 바쁘다며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모든 교사가 온라인 수업과 관련해서 연수를 들었어요. 그런데도 선배 선생님들이 계속 저를 불러서 화면에 얼굴이 나오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핸드폰으로 찍은 화면을 좌우로 전환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등등 끊임없이 물어보시는 거예요. 정말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부르고 또 부르고..."

후배의 말을 들은 나는, 원래 선배 선생님들은 어플이나 프로그램 다루는 것을 어려워한다, 부모님도 처음으로 스마트폰 사셨을 때 자식들이 어플 다 깔아주고 난 다음에 드리지 않느냐,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라고 조언을 했다.


"그런데 언니, 제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예요. 제가 화면 캡처까지 해 가면서 영상 편집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서를 밤늦게까지 만들어서 선생님들한테 보내드렸어요. 그런데도 저를 계속 부르시는 거예요. 제가 이 내용은 설명서 어디에 자세히 써 놨는데 보면서 설명해 드리겠다고 했더니, 설명서는 열어보지도 않았다고 하시는 거 있죠!' '우리 나이엔 그런 설명 같은 거 눈에 안 들어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냥 옆에 앉아서 방법을 알려달라는 거예요. 아니, 설명서를 보고 이해가 안 되는 거면 모를까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처음부터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시니 좀 답답했어요."


  후배의 말을 들으니, 예전에 신입교사였던 시절이 생각났다. 학급 담임은 물론 내가 맡은 업무 자체도 생소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는데, 한창 바쁜 학기 말에 생기부 담당 선생님이 나에게 생기부 입력 방법에 대해 물어보시는 게 아닌가. 자신이 몇 년째 맡고 있는 업무인데도 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말이었다. 나는 담당 선생님 책꽂이에서 얌전히 쉬고 있는 학교생활기록부 기재요령을 꺼내 펼쳐 가면서 생기부 입력 방법을 생기부 담당 선생님에게 알려주는 아이러니한 일을 며칠에 걸쳐 한 적이 있었다.


  벌써 사립고등학교 경력이 꽤 되는 나는 올해 그 '생기부' 업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나 역시 후배와 비슷한 경험을 종종 겪곤 한다. 생기부 기재에 관한 메시지를 보내면 "최 선생, 방금 뭐 보낸 거야? 잠깐 이쪽으로 와줘."라고 나를 부르는 선배 선생님 몇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자리에 가 보면 내가 보낸 첨부파일을 아예 열어보지도 않은 채,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직접 설명해 달라는 말을 하시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몇 년 전 아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 준 변신 로봇 설명서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당혹감을 떠올리곤 한다. 아들이 '로봇-제트기-자동차'로 변신하는 방법이 그려진 설명서를 들고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때는 마치 나에게 아랍어로 쓰여있는 책을 내밀며 무슨 말인지 알려 달라고 부탁하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워하자, 아들은 그것도 모르냐며 한숨을 쉬고는 혼자서 그 난해(?)한 설명서를 보고 3단 변신을 척척 해내고 말았다. 몇 번의 새로운 로봇을 다양한 방법으로 변신해 본 아들은, 그 후 새로운 로봇을 사든 친구 집에 가서 처음 보는 로봇을 가지고 놀든 간에 설명서가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들에게 어떻게 처음 보는 로봇을 그렇게 잘 변신하냐고 물어보니,

"그냥 어떻게 어떻게 하니 다 되던데요?"

라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놨다.


  십 년도 훨씬 전에 손으로 직접 업무를 처리하던 시절을 겪어 온 선배 선생님들에게 있어서 모든 업무를 컴퓨터상으로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여겨왔던 면대면 수업이 아닌 온라인 강의를 찍어야 하는 현재의 상황은 마치 내가 변신 로봇 설명서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 신입 선생님들 못지않게 멋진 편집 기술로 온라인 강의를 열성적으로 만드는 선배 선생님들도 있는가 하면, 비록 화려한 편집 기술은 없지만 자신이 담당한 교실 수업은 다른 사람의 온라인 강의를 가져오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찍어 올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칠판 앞 카메라를 멋쩍게 응시하며 판서하는 모습을 찍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그 어떤 방법이든 간에 내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역할에 대해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모습에서는 모두 같은 선상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며칠 전 우연히 국어과 수업의 온라인 강의를 보면서 말 그대로 입이 '쩍' 벌어짐을 느꼈다. 선생님이 직접 교정을 돌면서 학교의 모습들을 편집한 동영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파워포인트 화면 녹화 영상과 칠판 판서 영상 두 개가 적절히 잘 섞이면서 전혀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진 너무나도 멋진 수업 영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영상을 만든 학교 경력 2년 차 국어 선생님에게,

"선생님의 멋진 강의 보고 감동했어요. 온라인 강의 연수 때 배웠던 게 아닌 새로운 편집 방법을 쓰는 것 같은데 혹시 알 수 있을까요?"

란 메시지를 커피 쿠폰과 함께 보내보면 어떨까?

검색만 하면 뻔히 알 수 있는 편집 기술인데 내가 괜히 젊은 선생님을 귀찮게 하는 게 아닐지, 그 선생님이 혹시 변신 로봇을 좋아하는 조카가 있다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혹시

                                                    귀찮음과 나이듦을 핑계로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는 문을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있는것은 아닐까?

                                                             -감귤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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