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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선생님 Oct 30. 2020

당신의 남편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래도 당신은 내 남편

                                                        

  남편은 변비가 없다. 음식을 먹으면 바로 화장실에 가는 예민한 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남편이 한번 화장실에 들어가면 기본이 30분이다. 이런 남편의 모습은 정확히 내가 첫째를 낳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초반에 나는 도대체 이 사람이 안에서 뭘 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스포츠 중계 소리였다. 어느 날은 야구 중계를, 또 어떤 날엔 축구 중계 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으로 스포츠를 보는 게 취미였던 남편이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거의 텔레비전 자체를 켤 수가 없게 되자,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자신의 취미를 조금씩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친한 후배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남편에게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어느 날부턴가 한 시간 정도씩 화장실에서 몰래 게임을 하는데, 나올 때마다 마치 심한 변비에 걸린 것처럼 행동하는 게 아주 코미디언 저리 가라 할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내 입장에서는 자신의 잔소리로부터 남편이 화장실로 도망가는 게 꼴 보기 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남편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다. 자신의 집이긴 하지만 진짜 자신만의 개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화장실 변기는 일상으로부터의 탈피이자, 총각시절의 향수를 느끼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유일한 공간인 셈이다. 따라서 화장실에 들어가 딱딱한 플라스틱 변기에 앉아 은밀하고도 조심스레 자신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남편들에게 "도대체 안에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나와!"라고 소리치면 안 된다. 그게 반복될 경우 남편들은 회식이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피시방이나 목욕탕 같은 곳으로 그들의 개인 공간을 옮겨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숙사 사감을 하던 시절에 토요일 점심때면 학교에 와서 급식을 드시던 50대 남자 선생님이 계셨다. 주말인데 왜 집에서 쉬지 않으시고 학교에 나오셨냐고 내가 묻자, 선생님은 집보다 학교가 더 편하다면서 최근에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털어놓으셨다.

"토요일 점심때쯤에 아내한테 점심 뭐 먹을까 물어봤어. 그랬더니 화를 내면서 주말인데 점심밥도 챙겨줘야 하냐며 대충 라면이나 끓여 먹으라고 하는 거야. 아니, 내가 점심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뭐 먹을까냐고 물어본 게 다인데 말이야. 게다가 난 아침도 안 먹었고 그게 첫 끼였다고! 그래도 배가 고파서 어쨌든 라면 물을 끓이고 있었지. 그랬더니 갑자기 기숙사에 가 있던 아들놈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야. 아내가 화들짝 놀라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니까 속이 좀 안 좋아서 방금 사감 선생님 허락을 받고 집에 왔다고 대답하더라고. 그러자마자 아내가 아들 보고 잠깐 누워있으라고 하면서 갑자기 부엌으로 오더니 죽을 끓여야겠는데 냉동실에 소고기가 있네 없네, 마트에 가서 전복을 사 오네 마네,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 나한테는 라면 먹으라고 하더니!"

그러자 옆에서 같이 학교 급식을 드시던 주말 자율학습 감독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뭐, 그거 갖고 그래? 알아서 밥 먹으라고 말만 하는 거면 괜찮은 거지. 나는 주말에 좀 쉬려고 집에 있으면 누워만 있냐면서 청소기 좀 돌려라, 이불 좀 털어라 잔소리를 하는데 그래서 아예 주말 자율학습 감독을 하러 학교 나오는 게 더 편해. 지난번에는 거실에서 텔레비전만 본다고 뭐라고 하길래 학교 나와서 내 책상 컴퓨터로 봤더니 세상 편해!"

그 말을 듣고 주말에 라면 사건으로 아내에게 섭섭함을 토로했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를 너무 타박해. 전에 한 번은 다 같이 밥 먹는데 나도 모르게 방귀가 좀 나왔어. 아니, 나도 참으려고 했는데 나온 걸 어떡하냐고. 그랬더니 밥 먹으면서 비위 상하게 그런다고 아내가 또 나를 엄청 뭐라고 하는 거야. 근데 그때 아들이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가더라고. 그러더니 진짜 뿡뿡 소리를 내면서 볼일을 보는 거야. 내 방귀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지. 아들이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식탁에 앉자마자 아내가 배가 아픈 거 아니냐, 찜질을 좀 준비해 줄까, 약을 먹어볼 거냐 막 이렇게 물어보면서 걱정하는데 어찌나 섭섭하던지..."


  '완벽한 결혼 생활 매뉴얼'이라는 책을 보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노하우 중 하나로 상대방의 취미와 꿈을 존중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직장 생활과 육아, 그리고 집안일에 치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남편의 취미생활이 그저 '빈둥거리며 시간만 때우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내 아들이 나중에 결혼을 한 뒤, 화장실 변기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물론 내 아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그렇게 된다면 엄마로서 너무 슬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남편도 시부모님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들이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자신의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조금의 여유쯤은 누리게 해 줘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내본다.


"오늘 저녁 자기가 좋아하는 콩나물국밥 해줄까?"




                             부부란 서로 반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써 전체가 되는 것이다.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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