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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선생님 Sep 22. 2023

너의 베개, 나의 베개

베개에서 인생을 찾다

  안방에 있는 커다란 침대 위에는 항상 여덟 개의 베개가 있다. 네 개는 우리 네 식구가 각각 베고 잘 때 쓰고 세 개는 침대 양쪽에 길게, 마치 낮은 담처럼 놓여 있다. 침대 가장자리에 잘 때 껴안고 자기도 하고 간혹 떨어지는 걸 방지하는 용도이다. 남은 하나는 막내가 껴안고 자는 용도인데 딸이 잠들면 가끔 내가 슬쩍 가져와서 발아래에 끼워 놓고 자기도 한다.      


  커다란 침대에 대한 로망이 가득했던 나는 신혼 준비 기간 중에 침대에 가장 큰 돈을 썼다. 너무 큰 매트리스를 제작하는데 약 한 달 정도를 기다려야 했고, 당시 24평이었던 신혼집의 작은 안방은 커다란 침대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무언가를 놓을 수도 없었다. 침대 가로길이는 180센티미터여서 성인이 가로로 누워 자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이다. 당연히 우리 가족 넷은 매일 이 침대에서 엉겨 붙어서 잔다.     


  둘째 딸은 분홍색 꽃베개를 베고, 연두색 나뭇잎 무늬의 베개를 껴안고 자는 걸 좋아한다. 우리 가족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두 베개는 당연히 막내 자리에 놓여 있다. 가끔 첫째 아들이 동생을 괴롭히고 싶어 할 때 “이 베개 오늘은 오빠 거다!”라고 외치며 베개를 들고 도망가곤 하지만 어쨌든 우리 가족은 핑크색과 연두색 두 베개를 일부러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불을 세탁하는 날에 다른 베갯잇을 바꿔 놓으면 베개에 대한 소유욕이 딸에게서 보이지 않는다. 베었을 때의 촉감이나 베개솜의 높낮이보다는 단지 분홍색과 연두색이 마음에 들었을 뿐인 것이다. 다음 베갯잇을 바꾸기 전까지 딸은 그냥 침대 위 자기 자리에 놓인 베개 아무거나 잘 베고 잔다.     


  나는 여덟 개의 베개솜 중에 특정한 단 한 개의 솜을 무척 좋아한다. 물론 가족 중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베개가 입고 있는 옷만 구분할 뿐 속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 베개솜은 솜 뭉침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고르며, 머리를 베고 누우면 푸시식 천천히 내려가다가 딱 좋은 높이에서 가라앉기를 멈춘다. 모든 베개마다 조금씩은 존재하는 땀 얼룩도 없다. 그래서 이 배게는 나만의 것이며, 베갯잇을 갈아 끼우는 나만 구분할 수 있다.                

     

  어느 날 언니 집에 갔다가 소파 위에 잠깐 누워 쉬고 있는데 큰 조카가 나를 보더니, “이모, 안돼요!”라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영문도 모른 채 엉거주춤 소파에서 일어난 나에게 조카는 이렇게 말했다.

“이모, 그 베개는 아빠 거예요. 그래서 스프레이랑 흑채 같은 게 묻어 있어요. 어제 아빠가 거실에서 영화 보시다가 베개가 소파에 있었나 봐요. 빨리 그거 말고 다른 거, 제 꺼 드릴게요.”     

생각지도 못한 이유를 들은 나는 베개를 내려다봤고, 그제야 검은 얼룩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아까 얼굴을 돌릴 때마다 가끔씩 끈적임이 느껴졌었는데 알고 보니 헤어스프레이 잔여물이었다니 좀 충격이었다. 나중에 퇴근한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말했다.

“언니, 형부 베개만 좀 지저분하더라. 베갯잇 몇 개 더 사서 자주 바꿔줘.”

“야, 무슨 소리야? 금요일 밤마다 형부 서울에서 내려오고 난 뒤, 월요일 새벽에 올라가면 바로 베개 세탁하고 바꾸거든? 고작 삼일 정도 베고 잤는데도 저 정도야. 오늘 세탁하려고 내놓은 건데 네가 사용한 거야. 진짜, 남들이 보면 내가 남편한테 더러운 베개만 주는 줄 알겠다!”     


  그 후로 나는 언니 집에 가서 가끔씩 베개를 사용할 때마다 얼룩과 끈적임 여부를 꼼꼼히 확인하곤 했다. 또 가끔씩, 타지에 사는 형부가 그리울 때마다 일부러 형부 베개를 찾아보고 언니가 진짜 제대로 잘 세탁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니 집 헤어드라이어는 스프레이 때문에 손잡이를 맨 손으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끈적거린다는 것, 침대 옆과 소파 위 깨끗한 벽지들 사이로 스프레이와 흑채로 인한 끈끈한 얼룩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통달해버린 결혼 16년 차 언니는 형부의 헤어스프레이와 흑채를 손수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항상 집에 구비해 놓는다는 것을 말이다.               


  호주의 중심, 우룰루를 여행할 때 일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 열 다섯 명과 사막 트레킹을 했는데 잠도 역시 당연히 사막 위였다. 일반적인 침낭과는 다른 사막용 침낭은 속에 지저분한 일인용 매트리스가 들어 있었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얇은 시트를 가이드가 주면 매트리스를 그걸로 씌우고 들어가 자면 된다. 물론 베개는 없다. 그래서 수건이나 여분 옷을 접어서 베고 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한 독일 여자는 밤마다 잔꽃무늬가 있는 굉장히 푹신한(한번 손으로 눌러봤다) 오리털 베개를 베고 잤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그 베개를 큰 천으로 싸 놓은 뒤에 배낭에 넣었는데 아무리 봐도 베개와 여행을 함께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녕,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응, 뭔데?”

“그 베개 하나 넣으면 작은 배낭이 꽉 차던데 베개 든 작은 배낭을 앞에 메고, 큰 배낭을 뒤에 멘 채로 여행 다니고 있는 거야?”

“물론이지! 이 애 이름은 줄리야. 내 베스트 프렌드이고 나는 줄리가 있어야만 잘 수 있어.”

나는 박수를 치며 웃었고, 베개 친구와 여행 중인 독일 여행자에게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바위를 베개 삼고 가랑잎을 이불로 삼는다는 속담이 있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삶을 보여주는 말인데, 삶의 정도를 베개와 이불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우리 인생에서 베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색깔이나 무늬의 베갯잇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고, 베개솜이 중요하기도 하고, 또 베개 따위는 뭘 베든 전혀 상관없는 사람도 있다. 


  누가 누굴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줄리의 안부가 궁금하긴 하다.

물론 줄리가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말했던 독일인 여행자는 이름과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며, 다르게 사랑할 권리가 있다.

                                                         - 로버트 알란 실버스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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