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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Feb 24. 2023

소설을 읽는 이유, 글을 쓰는 이유

<책들의 부엌> 김지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일요일 밤. 뭔가 헛헛한 마음에 그냥 들어가기 아쉬웠다. 그래서 무작정 지하철역 내의 스마트도서관으로 향했다. 어떤 소설들이 남아있는지 보던 중 <책들의 부엌>이 눈에 띄었다.


예전 회사에서 책을 추천하는 블로그를 쓸 때에 보았던 책이다. 제목과 간단한 정보들만 보아서는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책. 하지만 이날 내 기분에는 딱 어울리는 책이었다. 같은 책을 보는데도 인상이 이렇게 다르다니. 역시 모두 타이밍인가 보다.


늦은 저녁 약속을 기다려야 했던, 그다음 날인 월요일. 뷰클런즈 카페(https://brunch.co.kr/@praygrape/81)에서 처음 이 책을 열어보았다. 북카페에서 읽는 북카페 소재의 소설이라니. 이런 우연이 있나. 그래서인지 더 몰입이 잘 되었던 것도 같다.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둔 유진은, 소양리로 내려와 낡은 한옥 터에 북카페와 북스테이 공간인 '소양리 북스 키친(Book's Kitchen)'을 오픈한다. 사촌동생 시우, 면접으로 채용한 형준, 그리고 시우의 친구 세린까지 스태프로 함께 한다. 이어서 각자의 사연을 안고 북스 키친을 찾아온 다인, 찬욱과 나윤, 소희, 지훈, 수혁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한 후반부에서 모든 인물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며 마무리된다.



북카페와 북스테이. 이따금씩 막연하게 상상하던 공간이다. 나의 로망을 집약시킨 공간이라고 해야 하나. 작가의 공간과 감정 묘사들은 좀 간지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표현들이 얼마만인지 생각하다 보니, 잊고 있던 추억과 휴식의 아지트를 마주한 기분마저 들었다.


책을 주제로 한 공간이 배경이다 보니 실제 출간된 책과 문구들도 소개되어 있다.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다. 한편으로는 위안도 되었다. 단어와 문장, 글과 말을 다루는 일을 하고 싶은 내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유진은 페이지를 스르륵 넘겨보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마치 문장이 자신을 불러 세운 것 같았다.
'여긴 생각하기에 좋은 장소야. 바닷가에 나가면 더 작아진 기분이 들거든. 내가 덜 중요해지는 것 같고. 그러면 모든 것이 알맞은 비율을 찾게 되지.'
_'1. 할머니와 밤하늘' 55쪽 / (인용) <그 겨울의 일주일>, 메이브 빈치_127쪽


ㄴ문장이 자신을 불러 세운 것 같다니. 다시 보니 이 소설은 '누군가가 나를 이끌어주었다'라는 식의 표현을 종종 쓰고 있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이 주인공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거듭 알려주듯이. ,

생각이 많아지며 스스로 작아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순간들. 나도 종종 겪는다. 그럴 때 저런 바닷가에 나가면, 나보다 더 큰 존재를 마주하며 위로받을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솟았다. '나만 이런 건가'하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데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윤은 오랜만에 자신의 감정과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막연함, 두려움, 소외감, 무기력함, 아쉬움 같은 감정을 애써 밀어내며 살아왔다. 긴장한 상태로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며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나면 집에서는 그저 쉬고 싶은 생각뿐이라 내면 상태가 어떤지 돌아볼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감정을 제대로 만나보니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였다. 거대하고 울창한 밀림 같은 감정 속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워서 발을 들이지 않고 살았던 자신에게 미안했다.
_'2. 안녕, 나의 20대' 86쪽


ㄴ이 작가님, 나랑 대화를 나눠봤던가? 나의 성향을 객관적으로 쓴다면 이런 상태일지도.



"내가 보기에 넌 이미 용기 있는 사자야. 너한테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자신감이야. 생명이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위험에 처하면 두려워하기 마련이지. 그런 두려움을 이기고 위험에 맞서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란다. 그런데 넌 그런 용기를 이미 갖고 있잖아." 오즈의 마법사가 말했다.
_'3. 최적 경로와 최단 경로' 98쪽 / (인용) <오즈의 마법사>, L. 라이먼 프랭크 바움_192쪽
"... 언젠가는 저 여자분도 알게 될까? 자신이 어떤 사랑을 받은 존재인지."
_'4. 한여름 밤의 꿈' 165쪽


ㄴ그래.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용기. 이미 내가 잘 해내고 있는데, 나만 나를 너무 엄격하게 대하고 있었다.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1등이라는 타이틀, 일류의 삶의 방식에 성공한 삶이라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매 순간 모두를 닦달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걸음마를 배우기를 기대하는 사회인 것 같기도 하고요... 정해진 경로에서 한번 삐끗해서 벗어나면 인생이 끝장나는 것처럼 겁을 주잖아요." ...
"그러니까 말이에요. 하아, 정작 내비게이션은 최단 거리라고 해서 섣불리 최적 경로라고 판단하지 않는데..."
_'3. 최적 경로와 최단 경로' 121쪽
"이제 전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그 모퉁이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을 거예요. 길모퉁이는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궁금하거든요.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어둠이 펼쳐질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있을지, 어떤 낯선 아름다움과 맞닥뜨릴지, 저 멀리 어떤 굽이 길과 언덕과 계곡이 펼쳐질지 말이에요."
_'5. 10월 둘째 주 금요일 오전 6시' 185쪽 / (인용) <빨강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_517쪽


ㄴ누군가에게 최적 경로였다고 해서, 나에게도 최적 경로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도 지도 어플을 볼 때마다 무심코 최단 경로를 먼저 검색하지만. 어떤 때는 주변의 건물들만 기억해 놓고 무작정 걸을 때도 있다. 나만의 최적 경로를 찾는 방법을 꼭 가져야겠다. 지켜야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게 주변이랑 비교하느라 쉽지 않겠지만.

그리고 나는 '모퉁이'에 이르면 겁부터 내는 사람이다.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서는데. 하지만 빨강 머리 앤처럼, 늘 모퉁이의 매력을 발견하고도 싶다. 그저 설렌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려보고 싶다. 아직 모퉁이를 돌기도 전인데 이미 본 것처럼 여기지 말자.



때로는 그리움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거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때로는 그리움이 풍기는 은은한 감정에 기댈 때가 있다. 때로는 그리운 마음이 눈송이처럼 그 사람에게도 내려서, 그도 문득 유진을 떠올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각자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지만, 그리운 마음속에서 언제나 만날 것이다. 그런 그리운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이야기의 물줄기를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_'6. 첫눈, 그리움 그리고 이야기' 214쪽
"... 수혁아,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 깊은 우물 속 같은 마음을 꺼내며 밤새도록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되는 거야. 아버지가 살아보니까 그렇더라. 화려한 시절도 지나가고, 미칠 듯한 열정과 환희의 순간도 빛이 바래지. 하지만 이야기는 영원히 남아. 이야기는 마음속에 남는 거니까. 어디 닳아서 없어지지도 않고, 깨어져 부서지지도 않더라..."
_'7. 크리스마스니까요' 270쪽


ㄴ그리움. 그리고 이와 같은 감정. 당장 해소해버리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하는구나. 누군가와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기도. 누군가 '마음의 영역이 넓은 사람'이라는 비유를 했었는데. 참 힘들겠다 하면서도, 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모순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마음이 쌓인 이야기들을 소중히 다루고 싶다.

나도 상대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며 관계를 이어나가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도 나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겨주고 있는 것이다.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의 속마음을 꺼내며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나게 해주는 사람. 이성친구이든 아니든 간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 소설 속 세계에 빠진 순간만큼은 진통제를 삼킨 것처럼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책의 세계에 빠져 있다 보면 등장인물이 문득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 같거든요. '인생에 참 어이없는 일이 많이 생기지? 진짜 이 정도일 줄 몰랐지?' 하고요."
_'5. 10월 둘째 주 금요일 오전 6시' 199쪽
"북스 키친은 말 그대로 책들의 부엌이에요. 음식처럼 마음의 허전한 구석을 채워주는 공간이 되길 바라면서 지었어요. 지난날의 저처럼 번아웃이 온 줄도 모르고 마음을 돌아보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맛있는 이야기가 솔솔 퍼져나가서 사람들이 마음의 허기를 느끼고 마음을 채워주는 이야기를 만나게 됐으면 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_'6. 첫눈, 그리움 그리고 이야기' 225쪽


ㄴ요즘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와 닮았다.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은 것. 나도 일종의 진통제가 필요했던 걸까? 음식, 공간, 책, 이야기, 누군가와의 대화. 그리고 지금 이 브런치에 쓰고 있는 글까지. 이것들이 내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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