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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 Aug 07. 2020

나는 아주 "잘" 이별하는 중입니다.

성숙한 이별 그게 뭔가요?

물론 이번 경우는 누구나 인정할 법한 상대방의 완전한 “잘못”으로, 어떻게 보면 나는 아무 준비 없이 맞은 이별이지만 지난날의 내 시간에서도 굵직한 이별들은 있었다.  


내 기억 속 아픈 이별의 첫 경험은 언제일까? 학교 앞에서 사온 메추라기가 일주일을 못 넘겨 아빠와 함께 아파트 화단에 묻고왔던 게 기억난다. 그때 펑펑 울며 다시는 나보다 먼저 떠나는 동물을 키우지 않겠노라! 고 다짐했지만 그 이후에도 뽀삐를 거쳐 지금 우리의 막둥이까지 어쩌다보니 사랑둥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입학한지 한 학기만에 전학을 가야했던 수택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이별도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이자 슬픔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어느 누구의 강요도 아닌, 오직 내 의지로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마지막 날 교탁에서 그 편지를 읽었었다. 엄마는 엄마도 생각하지 못한 나의 "편지 낭송" 이 귀여우면서도 나답다고 생각했다 한다. 이후에도 나는 지금까지 알바기간, 인턴기간, 심지어 2주간의 실습기간을 끝내면서도 늘 손수 쓴 편지들을 각 직원들에게 써서 주곤 한다. 누군가에겐 별 게 아닐지라도 소중한 인연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은 나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별이 이렇게 아름답고 훈훈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든든한 내 키다리아저씨였던 큰 삼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오랜시간 내 삶을 힘들게 했다, 아니 장악했다. 내가 처음 경험했던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 그랬고,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라 더욱 그랬다. 이런 이별은 부디 앞으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그 욕심같은 마음은 여전하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하고 맞이하는 이별이 안 슬픈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지막을 앞두고 내가 하고 싶은 말, 함께있을 시간까지 평생 미련으로 남기고 싶진 않다.


이렇게 보니“이별”이라 하면 쉽게 연인 사이에서의 이별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우리는 인생에서 꽤나 많은 이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 새삼 느낀다.


이별에 익숙한, 그래서 언제나 완벽한 이별을 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쯤 스스로에게 조금 더 “성숙한 이별”은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연애를 자주 해온 건 아니지만 나는 연인과의 이별에서 늘, 꽤 오랜 시간을 아파했다. 이렇게 말하면 귀엽다며 비웃을지 모르지만 지난 연애사를 돌이켜 봤을 때 나는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그리고 고등학생 때도 (스무 살 넘어 시작한 제대로 된 연애의 종지부가 고작 이거라니...갑자기 또 욱하네..)이별후유증으로 오랜 시간을 아파했다. 그래서 한 때 나는 헤어지고 금방 또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마치 오랜 시간 아파하는 것이 뭐라도 되는 것 마냥 내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마치 내 세상이 끝나는 것 마냥 연인과의 이별에서 매번 온 몸으로 아파했다. 울면서 집 앞에 찾아가서 죽치고 앉아 기다리기도 하고, 저주의 편지를 적어서 전남친 집 우편함에 넣어두기도 했었다. 더 이상 상대방이 나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갖지 못할 만큼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을 붙잡으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이별에서 내가 붙잡고 싶어했던 건 그 사람이 아닌, 우리의 관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헤어진 상대방과 완전히 연락을 끊고 나서도 술만 마시면 대성통곡을 하며 그 사람을 찾고, 기억 저 편에 묻어야 하는 행복했던 순간들을 놓지 못해 힘들어 했다.      


지금의 나는 어떨까? 지금의 나는 내가 생각하는 “성숙한 이별”을 하고 있을까. 아쉽게도 나의 대답은 “No.”이다. 나는 여전히 매일 밤 우리의 추억이 가득한 사진첩을 보며 지우지도, 끝까지 보지도 못한 채 울다 잠들고, 여전히 그 사람에게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싶고, 여전히 우리 관계를 이어 붙이고 싶다. 그러다가 또 그 사람을 원망하고, 그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으면 참지 못해 장문의 카톡을 보내기도 한다. 그걸 보냈다가 또 후회해서 삭제하고, 괜히 읽었나 안 읽었나를 확인한다. 하루 종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고, 그러다가 또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내 풀에 지쳐 그만두기를 반복한다. 슬픈 노래를 일부러 찾아듣고 싶다가도, 애써 쿨한척 하고 싶어서 신나는 팝송을 듣는다. 어느 것 하나에 오래 집중하는 것이 힘들고, 아무거나 먹지도 못하지만 괜히 혼자 이별한 티낸다고 할까봐 씩씩하게 회식에도 참석한다.


이런 내가 과연 성숙한 이별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성숙한 이별은 무엇일까?     


결국 그 고민 끝에 나는 성숙한 이별은 없다고, 아니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답을 내린다.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괴롭다가, 또 충분히 원망하다가 미칠듯이 그리워하는 것. 나는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이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아주 잘, 그 이별의 과정을 겪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나에겐 지금의 이별이 성숙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과정을 잘 지내고 나면 한 뼘 더 성숙한 내가 되어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언젠가는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더욱 아끼고 사랑해 주고, 나의 감정에 솔직해지며, 그래서 새로운 사랑도 두려워하지 않을 나를 기대해 본다.

키르에서 귀국하기 전, 이틀 밤낮으로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서툰 러시아어로 써주었던 손편지들
유난히 그리운 키르. 나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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