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4일 기나긴 병원 생활의 시작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무소식은 희소식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안 좋은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는 그 하루가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른다.
우리 부자는 그다지 연락을 많이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간간히 목소리만 듣는 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통화를 하더라도 3분 이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저 아무 소식이 없는 게 무탈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관계였다.
뭐 그다지 친한 부자사이도 아니기에 말이다.
그렇게 또 무탈한 하루가 지나가려던 순간.
윙~ 하는 진동소리와 함께 아버지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어 아빤데... 아빠 서울삼성병원 응급실에 와있네."
서울삼성병원. 대한민국 빅 5안에 들어가는 큰 병원.
지금도 검진 때문에 정기적으로 가는 곳이긴 하지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곳이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주차도 복잡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다.
이 병원을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대한민국에 아픈 사람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몸이 떨릴 정도로 생각하기 싫은 그런 곳이다.
아마 병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끗의 차이로 죽음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곳이니까.
사람들의 표정도 대부분 무표정에 메말라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병원은 나의 신장을 아버지께 기증한 병원이기도 하다.
간혹 아버지는 농담 식으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두 번째로 태어난 곳이여~" 라고 말이다.
어지간히 아프지 않은 이상 받아주지 않는 아주 크고 유명한 병원이다.
그러한 병원의 응급실에 아버지가 와있다는 말이었다.
"어디 아파?"
"감기인 줄 알았는데... 기침이 심해서 폐에 물까지 찼디야..."
"괜찮어?"
"어 괜찮어. 근데 불편하긴 하네... 그 뭐시기냐? 면도기랑 슬리퍼랑 병원 생활에 필요한 거 이것저것 좀 챙겨 와."
"알것어."
그렇게 병원 생활에 필요한 수건, 면도기, 슬리퍼, 세면도구 등등을 챙겨서 인천에서 차를 몰고 출발했다.
차를 타고 음악을 들으면서 이때까지만 해도 별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 이유는 신장을 이식하고 아버지는 꽤나 건강관리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신장에 대한 검진도 주기적으로 받아 온 아버지였다.
아마 아버지도 이때까지는 별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 응급실.
응급실에 입원한 아버지를 면회하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로나 이후 병원은 대기에 대기 그리고 또 대기, 무한대기의 시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대기한 후에야 아버지가 계신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기운이 쫙 빠지게 만드는 그곳으로 난 들어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응급실의 분위기가 너무 싫다.
사람들의 앓는 소리.
간호사들의 다급한 움직임과 알지 못하는 용어들이 난무하는 소리.
그리고 고성과 비명, 욕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응급실은 정말 기를 빼앗기고 돌아오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소리를 들어가면서 아버지가 누워있는 베드에 도착했다.
응급실에 아버지는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후줄근한 옷을 입은 채 베드에 누워있었다. 시골에 내려가 사는 아버지 그대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폐에 물이 차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 말고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의 아버지를 보며 한마디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여?"
"몰라. 충남대병원서 하도 차도가 없어서 삼성병원으로 온 거여."
"심각한 거야? 많이 아파?"
"아니 아직은 괜찮어?"
이때의 괜찮다는 아버지의 대화는 날 안심시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다 아버지도 이때까지는 그리 심각하게 아프진 않았던 것 같다.
뭐 어쨌든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의 컨디션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큰 병원에 와서 인지 한결 여유롭고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빠 지금 응급실 생활 72시간째여."
72시간째, 참 남다른 표현이다. 날짜를 시간으로 표현하는 방식.
아버지는 저렇게 지나간 날을 시간으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었다.
강력계 형사 생활을 오래 해서일까?
남들은 사일째라는 말을 저렇게 시간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아마 간부로 지낸 군생활, 그리고 경찰로 지내온 세월이 저런 표현 방식을 만들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 있었네... 왜 계속 응급실에 있는 거야?"
"병실이 없디야..."
"기다려 봐야 것네..."
"그 밑에 식당 가서 죽이랑 식혜 좀 사 와... 아무것도 못 먹고 방울토마토만 먹고 있네..."
"알겠어."
잠시 후 나는 죽과 식혜를 사 왔다.
죽을 받아 드는 아버지.
그러고 나서 나누는 또 한 번의 대화.
솔직히 이렇다 할 대화도 없었다. 침묵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다가 대뜸 아버지가 말했다.
"이번에 병원에서 치료하고 나가면 아무것도 안 할 거여~"
뭐 퇴직 때도 했던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말. 그저 쉬고 싶고 취미 생활만 하고 싶다는 말.
그러다가 대뜸 금산에 사시는 아주머니 한분과 혼인 신고를 하겠다는 말도 이어 붙였었다.
어머니와 이혼 후 줄 곧 혼자 사시던 아버지가 동생과 나에게 통보했다.
그렇게 통보를 하고 얼마 안 돼서 아버지는 명예퇴직을 하시고 금산으로 내려가셨다.
자신의 노후 생활을 위해 자식들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던 아버지였다.
여동생은 좀 실망했지만 난 그저 아버지의 인생이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백날 얘기해 봐야 자식들 말은 듣지 않는 그런 사람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아버지는 시골생활이 퍽 즐거우셨던지 그곳에서 많은 일들을 했다.
건강식품도 팔고 슈퍼도 하고 농업대학에 나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한 것치고는 꽤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시골생활을 즐기던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온 것이다.
"그려~ 마음대로 혀~ 언제는 뭐 내 말 들었나? 그냥 다 아빠 하고 싶은데로 했지."
살짝 비꼬는 듯한 나의 말투에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아버지라면 나의 이런 말에 귀싸대기를 날리고 욕을 하셨을 텐데...
말이 없으신 거 보면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에게만 유독 엄하시고 강하게 했던 분이시니까 말이다.
뭐 이런 게 우리 부자의 대화이다.
다른 부자들은 꽤나 까까운 대화를 많이 할까?
물론 가깝고 대화도 잘하는 부자사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 부자는 아니었다.
그저 말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자산의 삶을 사는 부자였다.
그러고 보니 삶의 방식이 아버지와 내가 꽤나 닮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는 핏줄인가 보다. 아무튼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응급실을 나오면 내가 말했다.
"암튼 나 먼저 갈게. 치료 잘하고 일반 병실로 가면 연락 줘."
"알것어."
대답을 들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에서 나왔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응급실을 탈출한 것이다.
뭐 조금의 걱정이 있었지만 별일 아니라는 생각이 이때까지만 해도 컸다.
아니 전혀 걱정이 없었다.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저 나의 시간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기나긴 병원생활이 시작된 줄도 모른 채 나는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