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해 피는 꽃 12화

12화 : 아픔을 관통하는 발걸음들

by 이원호

12화 : 아픔을 관통하는 발걸음들






전화는 밤새도록 울려댔다. 형동이는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 같았다. 하긴, 나를 가까이서 봐왔던 친구였다. 아마 성희의 죽음이 내게 끼칠 영향을 형동이는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떠나감을 방해받을 수는 없었기에 행여나 형동이가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를 재촉하면서 출발했다. 마당에 발을 내디디니 아침 일찍부터 어딜 가냐며 수련이가 낑낑댔다. 그 예쁜 모습을 안아주며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오십 분이었다. 수련이는 알고 있었을까. 내가 그토록 멀리 떠나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문득 수련이의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이 성희라는 것이 떠올라서 가슴에 칼을 꽂는 슬픔을 느꼈다. 그때 어린 강아지였던 수련이는 이제 어엿한 어른인 척을 하며 성희가 좋아했던 그 예쁜 눈망울을 똘망똘망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성희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생각하는 만큼의 아픔이라 나는 쫓기듯 세상으로 발걸음을 내밀어야만 했다.


동네를 빠져나가는 발걸음은 다급하면서도 이상하게 영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그리움이 벌써 마음을 움켜쥐어서 풍경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지난 몇 주간 지독한 아픔으로 회색빛이던 세상은 떠나려고 하자 그제야 새로운 색채를 찾아가고 있었다. 마음은 자꾸만 그 풍경 속에 안주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졌다. 아프지 않고 싶었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사랑할 줄 알게 되고 싶었고, 살아갈 줄 알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떠나야 했다. 아쉬움과 그리움을 고이 접어 가방에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족적 사이에 아픔이 고여 있었다.

한강을 지날 때에는 그 푸른 물결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가슴속에서 아득한 아픔이 고여 있다가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성희의 이름을 불렀다. 성희야. 네가 걸었던 길도 이런 길이었니. 이렇게나 아팠기에 살아갈 수 없었던 거였니. 내가 미웠니. 나는. 네가. 그래도.

이어지지 않는 말들이 오열이 되어서 터져 나왔다. 먹먹한 아픔이 심장을 멈출 듯 난폭하게 날뛰었다. 그 요동은 나마저도 강물 너머로 집어던져버릴 것 같았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흘러서 멈추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 굳어진 흐름은 내 친구의 작은 모습들마저 세상의 보이지 않는 구석들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눈물은 강물처럼 멈추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흐느낌이 무너져 내리며 쏟아졌다. 그 흐느낌에는 대답해줄 이가 없었다. 대답이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행이 내게 가져다줄 것은 둘 중 하나뿐이었다. 용서이거나, 죽음이거나. 둘 중 어느 하나도 여기서 무너져 내린 채로 나 자신에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한강을 건너고 나서부터는 지하철역을 이정표 삼아서 걸었다. 지하철역은 10분 간격으로 나타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표시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수서역을 지날 때쯤 되자 지하철역을 40분에 1개 보기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도와 발걸음에 의지하여 걷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내 목표는 부산까지 걸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부산 까지라면 그래도 삶을 횡단하는 발걸음의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세상을 지나쳐 나의 종말로 가기엔 괜찮은 거리였다. 500km,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까지 합치면 거진 700km가 넘는 거리였지만,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거리 때문에라도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다 스러지면 스러지는 대로, 쓰러지면 쓰러지는 대로 살기로 마음먹으며 나는 무던히 발걸음을 옮겼다.

첫날의 목적지는 성남시까지로 잡았지만 도망치듯 걷다 보니 오후 1시도 안되어 성남시를 지나쳐버릴 수 있었다. 아직 채 7시간도 걷지 않았던 차였다. 이대로 쉬기엔 마음속 고통이 조금도 잠잠해지지 않았어서 나는 다시 더 멀리까지 출발했다. 다리는 조금씩 저려왔지만 그 고통은 마음이 부서지는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죄책감의 싸늘한 감촉에 비하면 다리가 저리고 어깨가 아픈 것은 차라리 반갑기까지 했다. 몸이 아프고 힘들 때면 절망과 자괴감은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영혼의 죄를 몸에 대한 채찍질로 속죄하는 마냥 입안에 마른침이 허옇게 말라붙을 때까지 계속 걸었다. 하지만 용서도 구원도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로 삼았던 경기도 광주시는 밤 열두 시가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18시간째 걷고 있으니 다리는 반쯤 풀려서 흐느적댔고, 어깨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냥 텅 빈 감각을 선사하고 있었다. 길가에 내린 어둠은 도시에서 경험한 어둠과는 차원이 달랐다. 끈적끈적한 느낌으로 옷자락에 달라붙는 어둠을 털어내며 걸었다. 어둠은 눈을 가려대며 분탕질을 쳐대고 있었다. 그 분탕질 때문에 뒤에 따라붙은 검은색 승합차를 눈치챈 것은 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검은색 승합차는 어둠 속에 그 날카로운 악의를 감춘 채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었다. 길 위에는 나와 어둠 밖에는 없었기에 그 표적이 나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게 심장을 긁는 것 같은 긴장감을 선사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그 순간 몸의 피로도 마음의 고통도 시위를 떠난 살(虄)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빈 시위의 자리를 긴장이 다시 팽팽하게 채웠고, 그 순간부터 피 말리는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나는 최대한 길가에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차가 달려들면 길가 옆의 덤불숲으로 굴러 떨어져서 도망치려는 준비였다. 검은 승합차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길가에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소리 없이, 하지만 꾸준히 그것은 내 발자취를 쫓고 있었다. 두려움은 목구멍 안에서 숨 막히게 타올랐다. 나는 언제라도 앞으로 달려갈 수 있게 안간힘을 써야 했지만, 동시에 지금 당장 앞으로 달려가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도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길은 곧게 뻗어 있었다. 18시간을 걸은 다리와 어깨 위에서 삐거덕 거리는 20kg 무게의 가방을 가지곤 자동차를 따돌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 순간의 동물의 왕국에서 보았던 한 장면을 떠올리며 행동하고 있었다. 야생곰과 마주쳤을 때에는 무작정 도망치는 것보다 차분하고 대범하게 대응해야 살아날 확률이 높았고, 지금 이 순간도 야생곰과 마주쳤을 때와 그리 다를 바는 없었다. 결국 나는 공포와 마주하며 차분을 가장하려고 애썼고, 그것은 칼날 끝에서 만용을 부리는 기분이었다.

30분쯤 그렇게 걸었을까, 검은색 승합차는 갑자기 라이트를 켜고 천천히 가까이 다가왔다. 짙게 선팅이 되어있는 유리창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감에 뼈마디가 하얗게 변할 때까지 손을 움켜쥐자 유리창이 문틈 사이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며 열렸다. 차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아파서 눈을 잠시 움찔거렸다. 운전석에는 나이가 사십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가 앉아 있었다. 붉은 립스틱과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끼워져 있는 굵은 반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 어디까지 가? 태워다 줄까?”

“아니에요. 거의 다 왔어요. 감사합니다.”

불안을 숨기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얼굴에는 가면 같은 평온이 머물러 있었지만 그 표정이 영 어색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차 속의 아줌마도 알고 있었다. 차 안의 눈길이 하얗게 꼭 쥐어진 내 주먹을 뱀처럼 힐끗 훑었다.

“그래. 마을까지는 머니까. 조심해서 가렴.”

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고, 그 모습에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승합차의 붉은 등이 멀리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모든 불빛이 사라진 뒤에야 숨이 멎는 듯한 긴장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안심했던 탓일까, 30분 뒤 그들이 불을 끄고 기다리고 있다가 풀숲으로부터 튀어나와서 덮쳤을 때, 나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2명의 남자는 덤불로부터 튀어나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졸랐다. 반항하려고 해 봐도 목에 감긴 밧줄은 모든 힘을 앗아갔다. 천천히 마지막 호흡과 세상의 모습이 스르르 몸을 떠났다. 동공을 중심으로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세상의 색채가 빠져나갔다. 팔다리는 내 것이 아닌 듯 무거워져 갔고 세상은 점차 아득해졌다. 그것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심해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수면 위에선 찬란한 빛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았다. 차갑고 어두운 물은 공포로 꿀렁이며 폐와 코를 채워갔다. 토해내려고 한들 온통 암흑뿐이라 비명조차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수면 위에선 부서지는 햇살인지 도시의 불빛인지 모를 찬란함이 간절한 갈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물 먹은 솜 같은 손짓으론 그 광채에 도달할 수 없었다. 천천히 모든 시체의 고향을 향해 잠겨 들어갔다. 서서히 멈춰가는 감각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생의 마지막 불길처럼 타올랐다. 강 속으로 가라앉던 성희도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제야 조금 그 아이의 마지막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밧줄이 약간 느슨해졌다. 막혀있던 피가 폭포수처럼 머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암흑 속으로 가라앉던 시야에 별똥별 같은 폭발이 일어났고 팔다리에선 전기가 통하는 듯한 쾌감과 함께 힘이 돌아왔다. 그 짜릿한 생의 느낌은 갓 태어난 야생마처럼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그 힘으로 그대로 발을 들어 머리 위에서 목을 조르던 남자의 왼쪽 눈을 차 버렸다. 처절한 비명이 밤을 수놓았다.

“크아아아악!”

나는 그대로 몸을 비틀어 길옆의 덤불숲으로 굴러 떨어졌다. 언덕길 밑으로 길게 자란 덤불은 고맙게도 내 모습을 바로 감추어주었다. 멀리서 시동을 켜고 후진하며 달려오는 검은 승합차의 후미등이 보였다. 눈을 걷어 차인 남자는 계속 울부짖고 있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나를 쫓아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허리를 숙인 채로 덤불숲 사이를 헤치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저놈 잡아와!” 하는 아줌마의 소리 높은 고성이 메아리쳤다. 살아야겠다는 일념만이 온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심장은 쿵쾅거리며 온 몸의 가장 끝자락까지 도망칠 힘을 전달했다. 숨이 막혀오고 있었고 온 몸에 생채기가 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자각조차 못한 채 보이지도 않은 숲 속을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 때까지 나는 숨 막히는 질주를 거듭했다. 넘어진 장소에서 흙을 뱉어 나자 공사하다가 버려둔 듯한 하수도관들이 눈앞에 들어왔다. 넘어진 충격은 그 안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보다 한 발자국 늦게 리를 강타했고, 나는 하수도관을 향해 기듯이 꿈틀거리며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더 이상 뛸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나는 관 속으로 허겁지겁 기어들어갔다. 관 속에서 잔치를 벌이던 생쥐들이 놀라서 부리나케 도망쳤지만, 가까스로 소리를 지르지 않은 채 숨을 수 있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대포보다도 크게 느껴져서 입을 틀어막으니 입 안에 진흙과 피가 섞여서 들어왔다. 나는 온몸을 들썩이며 눈물과 섞인 땀을 흘려보냈다. 공포는 숨죽인 울음소리와 섞여 대기에 녹아들고 있었다. 밤의 침묵은 관속의 나를 어설프게나마 가려주었지만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체처럼 관 속에 누운 채로 입을 틀어막은 채로 시간을 죽였다. 시간은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영원히 흐르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 째깍, 째깍, 하고 지나가며 삶을 축냈다. 그렇게 첫날밤이 흘러갔다.




다음날의 아침이 세상을 두드린 방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수탉은 관 건너편에서 여명의 목소리로 울었고 그 울음소리는 관속을 온통 메아리치며 온몸을 때렸다. 모든 아침은 인간을 두드려 삶 속으로 내쫓기 마련이지만 또 이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나를 깨운 아침은 처음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관의 천장이 이마를 격하게 쓰다듬었다. 호되게 부딪히는 순간 코에서는 코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나는 황급히 피를 손바닥으로 막았지만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온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로 관에서 기어 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산새들이 기겁을 하며 날아올랐다. 새들이 뚫고 지나간 나뭇잎 사이로 아침햇살이 찬란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피비린내 사이로 햇살을 입안에 머금으려고 노력했다. 밤의 공포를 뚫은 짜릿한 생의 감각이 햇살과 함께 목을 축여주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모든 관절과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특히 다리 쪽 근육들은 불이 붙은 것만 같이 화끈거렸다. 허리는 이미 끊어진 듯 감각이 없었고, 팔에는 온통 긁히고 찢긴 생채기들이 나있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발끝부터 올라와 온 몸을 물어뜯어 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생생한 고통 속에 놓여 있기에, 삶의 감각은 더 생생했다. 나는 살아있었다. 모든 쓰라린 상처와 뒤틀린 관절과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으로 내가 살아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산새들이 수군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여행의 두 번째 날이 시작되었다.


뒤쫓는 사람들은 없었다. 덤불 속을 뒤져서 사람을 찾아내기에 어젯밤은 너무 길고 어두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수시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점차 마음이 안정된 채로 걸을 수 있었다. 차분함을 되찾으며 30분 정도 걸으니 작은 개울이 나타났다. 물이 엄청 깨끗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흙과 피딱지로 범벅이 된 내 모습보다는 맑은 것이었다.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물가로 들어가자 서늘한 도랑물의 느낌에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그래도 그 맑은 냉기는 열독처럼 남아있던 공포와 아픔의 흔적들을 깨끗이 닦아내어 주었다.

물속 깊은 곳에선 팔뚝만 한 잉어들이 어슬렁거리며 헤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류라기보다는 선사시대부터 생존해온 파충류의 펄떡거리는 일부분 같았다. 그 비늘 덮인 꿈틀거림 때문에 차마 깊은 곳 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물가에서 상처를 씻고 피를 닦아 내어야만 했다. 잉어들은 깊은 곳에서, 나는 얕은 곳에서 그렇게 각자의 공간을 지키며 평온을 찾아갔다.

옷이 마를 때까지 잠시 개울가에 앉아서 쉬자, 어젯밤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튀어나와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다. 나는 겪을 뻔했던 죽음과 이미 겪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밧줄이 목을 감던 그 순간에 느껴졌던 것은 적막한 평온이었다. 해저로 가라앉는 듯한 그 어두운 느낌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침묵으로 가져갔었다. 하지만 그 뒤의 섬광 같은 생으로의 의지는 폭죽처럼 터지며 삶의 전투 한복판으로 나를 다시 되돌려 놓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상처 입고, 죽이고, 도망쳐야 하는 그 전쟁터 한복판으로 말이다. 그 삶에 대한 갈망은 살아온 모든 시간을 선명히 더듬을 수 있게 해주는 힘이자, 적막한 죽음의 평온으로부터 쫓아내는 섬전(閃電) 같은 감각이었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부서지고 아파하며 찬란한 삶을 살아야 할지 아니면 고요하고 평온한 죽음의 바닷속을 헤엄쳐야 할지 말이다. 아직 길 위에서 헤매고 있었기에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직 내가 누구인지도 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옷은 오후가 다 되어서야 완전히 말랐고, 발걸음은 다시 시작되었다. 죽을 만큼 멀리 도망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걷던 도로는 생각보다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쭉 뻗은 도로에는 차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밤과는 참 다른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서 끈적이던 악의와 공포는 한낮의 밝음 속에서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람만이 억새 수풀을 기억으로 쓰다듬으며 허공으로 사라져 갈 뿐이었다.

광주시 경찰서에 들려서 밤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경찰 아저씨는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근래 이 부근에서 실종사고가 자주 일어난다고 그랬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일이 많아 죽겠다고 투덜거리는 아저씨에게 그러시냐고, 참 힘드시겠다고, 힘내시라고 말씀드리는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렇듯 타인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아파한들, 죽어버린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들 ‘아- 그래요? 그런 일은 자주 있죠. 별거 아니에요.’ 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경찰서의 아저씨는 내게 그랬고 나는 성희에게 그랬었다. 어쩌면 우리가 평생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슬픈 깨달음이 찾아왔다. 문득 외로워지고 그리워졌다. 성희도, 선연이도, 그리고 집에서 영문도 모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련이마저도 말이다.






여행은 계속되었다. 참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첫날밤의 사건 이후로 절대로 밤에는 걷지 않았다. 해가 질 낌새만 보여도 찜질방이든 교회든 절이든 무조건 안전한 곳을 찾아들어가 하룻밤을 묵었다. 그것은 낮 동안에는 더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새벽 6시만 되면 어디에서 잠이 들었던지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으면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를 걸을 수 있었다. 보통 1시간에 4km 정도를 걸으니 매일 대략 30km에서 40km 정도를 걸었던 셈이다. 당연하게도 발은 부르텄고 입안에는 갈증이 허옇게 말라붙었다. 가방의 무게는 매일 조금씩 가벼워져갔지만 두 어깨에 올려진 죄책감과 영혼의 무게는 매일 더 무거워져만 갔다. 배고파서 움직일 수가 없을 때면 밥을 먹었고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그 자리에 쓰러져서 쉬었다. 몇 날 며칠을 한마디의 말조차도 하지 않은 채 걷는 순간들의 지속되었다. 그 침묵의 간극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담겼다.

마음속에 담기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는 행복한 생각들도 있었고 괴로운 생각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성희가 내게 남겼던 삶에 대한 의문들이 가장 많았다.

언젠가 나른한 오후에 어학특기자 반에 앉아서 성희는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찰스! 혹시 ‘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본 적 있어?”

고등학교 논술 책에서나 나올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고개를 저었었다.

“그럼 한번 고민해봐 챨스. 그건 꽤 중요한 질문인걸. 그걸 알아야 알을 깨고 나갈 수 있어. 아니면 잠에서 깨서 나가거나.”

그 말을 끝으로 성희는 크게 하품을 하며 세수를 하러 나가버렸었다.

단순해 보였던 그 질문은 오래도록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세상이 변하고 흔들려도 그대로인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세상을 관조하려고 해 보자 괜히 선연이 생각만 자꾸 떠올랐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다던 선연이의 이야기 역시 나를 찾고 나를 알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세상과 나의 경계는 모호해지기만 했다. 세상은 나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댔다. 그중 어느 것이 나이고 어느 것이 아닌지는 쉽사리 알 수 없었다.

정답을 찾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며칠 뒤 성희에게 답을 물어보았을 때 성희는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었다.

“음. 찰스. 너는 너야. 근데 사실 그걸 누가 말해준다고 해서 별다른 도움은 안 될지도 몰라.”

그러곤 성희는 깔깔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도록 나를 맴돌았다. 성희가 해준 말은 정말로 도움이 안 되는 게 분명했다. 성희는 그걸 알았음에도 살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 사실이 다시금 나를 슬프게 채웠다.

성희가 그때 던진 그 질문은 길 위에서 다시금 다가왔다. 나는 무엇일까. 너는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을 어설프게만 할 줄 알아서 우리는 알을 깨고 나올 수가 없었던 걸까. 그래서 너는 죽어야 했고 나는 아파해야 했던 걸까. 함께 했던 시간은 알껍질을 톡톡 두드려 잠을 깨워주기는 했지만 우리를 삶까지 인도해주지는 못했다. 파란(破卵)의 그 고통스러운 순간은 동시에 가장 짜릿한 생의 희열이기도 했다. 마치 목에 밧줄이 감겼다가 풀렸을 때 느꼈던 그 불꽃같은 감각처럼 그것은 삶을 달구고 죽음을 쫓아내었다. 하지만 그 희열에 도래하지 못한 채 너는 고통 속에서 부서졌고, 나는 부서지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던 너라는 세상의 일부가 멎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내 이름의 자리에는 아픈 공백뿐이었다.

끊임없는 발걸음과 그 족적 사이에 고이는 생각들로 계속해서 나 자신을 더듬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듬었다. 그 길은 유리디체의 손을 잡은 오르페우스의 길처럼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가 그랬듯 나 역시 후회와 죄책감과 불안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많은 기억들이 굳어진 채 돌이 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길 위에선 수많은 삶과 죽음의 조각들을 맞닥트릴 수 있었다. 한 번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새벽의 어슴푸레한 안갯속에서 삵을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 그저 큰 고양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푸르스름한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압도적인 자세로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 광포한 눈빛은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도시의 도둑고양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삵의 안광은 머리 위의 개밥바라기별보다도 더 환하게 빛나며 어둠과 안개 모두를 꿰뚫고 발걸음을 저지했다. 낮게 우는 그것의 울음소리는 뼈가 저려오는 저음으로 내장을 부드럽게 흔들어놓았고, 나는 그 느낌에 오금이 저려와 자세를 곧추세웠다. 그 귀기 어린 모습은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뒤돌아 도망칠 수도 없는 위압감이었기에 나는 한참을 제자리에 못 박힌 채로 삵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삵도 나도 우리가 두려움으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빈틈을 보이면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머뭇거림이 마침내 햇살이 되며 동이 터져 나왔을 때에야 삵은 빳빳했던 뒷목의 털을 내리고 등을 돌려 새벽을 따라 사라졌다. 그제야 나도 계속 앞으로 걸을 수 있었다.

길 위에서 끔찍한 죽음의 풍경을 눈에 담았던 적도 있었다. 길은 교통사고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수많은 토끼나 새 같은 작은 생명들이 길가에는 죽어있었고, 때로는 그보다 심한 것들이 짓뭉개져 있었다. 산산조각 난 사슴인지 말인지 모를 거대한 생명체의 죽음을 길가에서 마주쳤던 적도 있었다. 산등성이를 돌기 전부터 그것의 비릿한 죽음의 냄새와 혈향(血香)이 대기 중에 끈적끈적하게 녹아있었다. 그 냄새에 인상을 쓰며 커브길을 도는 순간, 그 처참한 광경은 내 시야의 일부가 되었다.

반쯤은 아스팔트에 곤죽이 되어 눌어붙어있고 나머지 반은 반경 20m 주변에 흩뿌려져 피바다를 만들고 있는 그 처참한 형체를 본 순간,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산자의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그것의 내장은 아주 멀리까지 튀어나가 나무에 걸려있었고 무엇인지 제대로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사지는 도로 곳곳에 기묘한 표지판처럼 널려 있었다. 그 지옥도 속에서 생경한 깨달음이 다가왔다. 죽은 이는 편안할 것이다.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죽은 자가 남긴 풍경은 살아남은 이에게 격한 거부감과 괴로움을 불러일으켰다. 삶의 모든 부분이 기형적인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면서 토악질을 했다. 삶이 죽음보다 그리 나을 것도 없을진대 말이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지옥도 사이를 통과했다. 산을 넘어간 뒤로는 피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을 마주했던 것만큼이나 길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찬란한 생(生)을 마주하기도 했다. 길가에서는 수많은 이름 모를 꽃들이 하늘을 향해 피고 지었다. 움직이는 나와는 달리 꽃들은 뿌리내리고 자라고 있었지만, 내 걸음이 여행이듯, 꽃들이 피어남도 여행이었다. 애벌레들은 꽃대에 매달려 시간을 견디다가 나비로 피어났고, 여름 비에 취한 개구리들은 제 무덤이 될지 모른 채 길가로 뛰어올랐다. 나비의 손짓에 답하고 정신 나간 개구리들의 엉덩이를 차 다시 개울가로 돌려보내며 그렇게 속절없이 계속 걸었다. 걸음도 고통도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살고 싶은 걸까. 죽고 싶은 걸까. 죽고 싶다는 말은 살아보고 싶다는 말은 아닐까. 살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기 위해 달려가겠다는 말은 아닐까. 대답이 없는 질문만이 자꾸 나를 맴돌았다. 그렇게 질문을 던지다 보면 외로움도 배고픔도 고통도 다 발자국 사이에 눌어붙어 나의 일부가 되었다. 용광로 같은 여름의 열기와 발걸음의 둔탁한 망치질로 세상의 많은 부분을 녹여내고 두드려내어 나로 빚어내고 있었다.





경상도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어둠이 다가오고 있는데 잘만한 곳은 어디에도 눈에 띄질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목적지였던 문경시는 표지판에 나오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마을을 찾기 시작했다. 해가 진 뒤에 산길을 헤매는 악몽은 절대로 꾸고 싶지 않았기에 걸음에는 필사적인 몸부림이 깃들었다.

표지판은 곧 나타났다. 『읍묘(揖墓)리 - 3km』라고 적혀있는 간판을 보곤 앞뒤 잴 것 없이 그 길로 들어섰다. 꽤 상세한 편이던 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좁은 산길을 따라 걸은 지 30분도 채 안되어 30가구 남짓의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입구의 비석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웅장한 글씨로 마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선 사무원인 듯 보이는 여직원이 문을 닫고 퇴근하고 있었다. 묵을 곳이 혹시 없느냐는 내 질문에 여직원은 머뭇거리다가 10분쯤 걸어가면 있는 마을 공터에 텐트를 치고 자면 괜찮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달빛은 별로 없었지만 날씨는 맑은 날이었다. 침낭 속에 들어가서 자면 괜찮을 것 같아서 흔쾌히 수락하고 걸음을 옮겼다.

공터에 도착해보니 거의 해가 진 가운데 몇몇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멀리 나무 아래에서는 여자아이 한 명이 턱을 괸 채로 축구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통 난 표정으로 나무 그늘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 하도 자연스러워 무심결에 지나칠 그 작은 모습을 지나칠 뻔했다. 그 아이는 침낭을 펴고 있는 나를 보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 여기서 뭐해요?”

살면서 몇 번 들어본 적이 없는 오빠라는 말이 어색해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응. 안녕. 내가 여행 중인데 잘 곳이 없어서 여기서 자고 가려고.”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짜요? 여기서요?”

“응 오늘 하룻밤만이야.”

“여기는 집이 없는데요?”

웃으며 침낭을 들어 보였다.

“이게 당분간 내 침대이자 집이야.”

여자아이는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짜요? 정말요?”

정말 확실한 걸 좋아하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관상을 살피듯 내 미간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여기 귀신 나오는데?”

얼음에 빠진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고개를 돌려 여자아이를 쳐다보자 아이는 신기한 것이라도 본다는 듯이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뭐라고?”

“여기 귀신 나와요. 그리 좋은 귀신은 아니라 몇 명 죽었어요. 그래서 해지기 전에 저기 남자애들도 집에 갈걸요? 나는 쟤네가 귀신한테 잡혀갈까 봐 망봐주고 있던 거구요.”

등골에 오싹한 느낌이 들어서 흘깃 서산을 바라보았다. 해는 산너머로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여자아이는 내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해가 완전히 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망 봐줄 사람 없어요?”

어느새 축구를 하던 남자아이들도 공차기를 멈추고 내 주변에 둥글게 모여들었다.

“헐, 형 여기서 자려고요?”

“형 여기서 자면 죽어요. 저번에도 어떤 아저씨 술 먹고 여기서 자다가 죽었는데.”

웅성거리는 아이들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질문을 던졌다.

“귀신이 나온다던데, 어떤 귀신인지 혹시 아니?”

“잘은 몰라요. 어른들 말로는 저기 산 옆 터널에서 죽은 건넛마을 누나라고 하던데요. 집에 오다가 8톤 트럭에 치여서 죽었대요.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8톤 트럭에 치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산등성이의 형체를 알 수 없던 흉측한 고깃덩어리의 모습이 대번에 선명히 눈앞에 떠올랐다. 터널 안의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쳐버렸다.

아이들은 해가 진다며 창백하게 질린 나를 두고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여자아이만 혼자 마지막까지 남아서 위로의 말을 건네다가 갔다.

“오빠, 너무 걱정하지는 마요. 내일 아침에 와서 오빠가 안 살아있으면 매년 무덤에 안개꽃을 꺾어다 줄게요. 그리 외롭지는 않을 거야요.”

그건 그리 좋은 위로는 아니었다.






낮이 딸깍이듯 꺼지자 밤이 그 자리를 호곡성과 함께 채웠다. 달이 없는 그 밤은 정말로 어두웠다. 하루 종일 걸었기 때문에 무척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로 짙은 어둠은 잠이 찾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저 어두운 것만으로 이토록 숨 막히게 두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경기도에서 승합차에 쫓겼을 때에는 도망쳐야만 하는 실재하는 공포가 있었다. 새벽녘에 길에서 삵을 만났을 때에도 그 자리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어둠뿐인데도 숨 막히게 두려웠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그 자리에는 상상이 온갖 두려움을 빚어내어 똬리를 틀었다. 어둠 속의 독사처럼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은 새하얀 독아를 빛내고 있었다. 그것을 상상하며 미칠 듯한 히스테리적인 상태가 되어버렸다. 온갖 발작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며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눈을 채 1초도 감지 못한 채 밤은 속절없이 흘렀다.

어느 순간, 밤은 더 이상 나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렴풋한 시야의 구석으로 산길을 타고 사람들이 공터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밤이 되어도 이렇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귀신에 대한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이들은 흔히 그렇듯 떠도는 괴담을 어린 마음에 곧이곧대로 믿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학교괴담을 만들고 믿어버리듯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져서 잠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깜빡 잠이 들었었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뜨니 머리 위에서 눈이 시퍼런 귀신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천천히 기어 내려왔다. 악몽인가 싶었지만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산에서는 아무도 내려오고 있지 않았고, 산길이라고 생각했던 곳에는 철망이 쳐져있었다. 시계를 보았지만 원래 시간이 몇 시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기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잠을 잘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이도 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차라리 가서 공포를 마주해봐야겠다고, 죽어도 큰 상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이 여행 자체가 나의 끝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정해진 바가 없었고, 지금 이곳이라고 해도 특별히 나쁠 것은 없었다. 터널을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전등을 꺼내어보았지만 밤을 밝히기에 그 불빛은 너무 약했다. 차라리 불을 아예 끄는 게 낫겠다 싶어서 손전등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아예 어둡다면 어쩌면 귀신도 사람도 나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귀신이야 그렇다고 쳐도 사람에게 밤에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았다. 홀로 내 마음을 온전히 마주하고 싶었다. 정말로 바라는 것이 처참한 죽음인지 아니면 그 처절한 죽음 사이의 생인지 알고 싶어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먹을 갈아서 만든 듯, 밤은 만지면 묵향(墨香)이 묻어 나올 듯 새카맸다. 이러면 조금 보일까 싶어서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무언가가 채 보이기도 전에 어둠은 빛을 삼켰다. 사진에서는 미세한 먼지가 눈송이처럼 암흑 속에서 내리는 것이 찍혔다. 계속 들여다보면 사진 속에서 이상한 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서둘러 사진기를 꺼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손짓으로 가르쳐준 터널은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채 머뭇거릴 새도 없이 입구에 도착해버렸기에 약간 어리벙벙함을 느꼈을 뿐이다. 운명과 시간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큰 상관은 없다고 애써 마음을 먹었다.

터널은 군데군데 깨진 등과 얼룩진 벽 말고는 특별히 이상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바람이 불어올 때면 터널 사이에서 음산한 귀곡성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터널 반대편에서는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가로등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머뭇거리다가 터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마지막 남은 깜빡거리던 등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터널의 틈새로 어둠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터널을 가득 채운 암흑 속에서는 출구를 알리는 빛만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인영(人影)이 그곳으로부터 미끄러지듯 걸어왔다. 그것의 움직임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은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검은 머릿결에 감추어져 있었고 하늘거리는 옷자락 사이에는 핏줄이 불거진 새하얀 팔이 있었다. 도망치고 싶다고 본능이 바지춤을 잡아채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절망은 발걸음을 비끄러매었다. 절망은 속삭였다. 조금만 더 머뭇거리면 죽을 수 있었고, 아픔에서 빠져나와 평온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애달픈 속삭임은 조금은 희망과도 닮아있었다.

그림자는 걸어왔다. 사람을 닮았지만 사람이 아닌 그것에 달린 모든 부분이 소름 끼치도록 섬뜩했다. 어둠을 소리 없이 걸으며 나지막한 귀곡성을 내는 그것은 여자였다. 가녀리면서도 시체처럼 굳어진 몸의 굴곡이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죄책감이 비수처럼 심장을 차갑게 찔렀다. 내가 죽인 너도 이처럼 세상을 원한으로 떠돌고 있을까 봐 마음이 아파서 눈을 감고 말았다.

눈을 다시 뜨니 귀신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기괴하게 목을 꺾으며 그것은 소름 끼치는 멍한 웃음을 내게 지어 보였다. 허연 뼈가 드러나 보이는 손가락으로 그것은 팔목을 거머쥐었다. 팔이 부서질 듯한 냉기와 가슴이 내려앉는 슬픔이 뼈마디 사이로 전달되어 왔다. 그건 참 익숙한 고통이었다. 땅을 디딜 때마다 온몸을 울리는 절망이 바로 그 고통이었다. 귀신이 건네주지 않아도 나는 매일 나 자신의 공포이자 악몽이었다. 귀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죽은 뒤에 그렇게 괴로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괴로웠기에 죽어야만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나도 같은 고통을 겪다가 죽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귀신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핏줄이 툭툭 불거지고 동공이 고양이 마냥 응축된 그 눈은 생각이 멎을 만큼 나를 두렵게도 했지만 동시에 조금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 모습이 성희가 아니라는 사실은 내게 공포보다 큰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그 사실이 참 슬퍼서 말없이 오열하고 말았다.





나는 그 순간 굴러 떨어지며 잠에서 깼다. 터널은커녕 공터의 벤치 위였다. 희한하게도 하룻밤 동안 두 번이나 꿈에서 깨었고, 그때마다 이 벤치 위였다. 산새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며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먹다 남긴 과일 통조림에는 수많은 벌레들이 빠져 죽어 있었고 과자 봉지는 밤새 들고양이가 맛이라도 보았는지 온통 찢어져 있었다. 긴 밤 동안 분주했던 것은 비단 꿈속의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인가 보다.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 들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뻐근한 손목을 풀어주었다. 반짝이는 묵주팔찌의 결 사이로 선명한 손자국이 나있어서 문득 소름이 돋고 말았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공터를 나서는데 어제 그 남자아이들이 축구공을 들고 들이닥쳤다.

“어- 형 안 죽었네요? 지금 가요?”

첫 번째 질문은 대답하기에 다분히 까다로웠기에 두 번째 질문에만 대답했다.

“응. 이제 가려고.”

혹시나 무덤에 안개꽃을 두겠다던 그 여자아이가 오면 내가 죽은 게 아니라 아침이 되어서 떠난 것이라고 전해달라고 남자아이들에게 말하자, 아이들은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형. 무슨 소리예요. 우리 동네엔 여자아이가 없는데.”

덕분에 아침 햇살이 공터에 가득한데도 등골에는 서늘함이 가득해지고 말았다.






여행은 어느새 끝자락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길고 힘들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조차도 돌아보면 순간이었다. 모든 여정은 시작하면 끝이 난다는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시작과 끝은 필연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그것은 길에서도, 삶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조만간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은 기분이 들었다.

김해로 향하는 길에 처음 발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 숨 막히는 황홀감이 온몸을 채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길가에선 사과나무 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과꽃은 새하얀 물결이 되어 눈송이처럼 마음을 포근히 덮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나도 함께 하늘을 향해 고요히 흔들렸다.

하늘은 구름 결 사이로 부서지고 있었다. 금이 간 창공 사이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세상에 감추어져 있던 천국의 비밀을 내게만 남모래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가슴 벅찬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어린 새매는 그 길가에서 사냥을 했다. 억새밭 사이로 시간을 가르는 찰나의 선이 되어 내리 꽂히는 그 모습에는 생생한 삶의 박동이 담겨 있었다. 젊은 들쥐는 하늘에서부터 내리 꽂히는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쳤다. 재빠른 눈치와 민첩한 네 발이 오늘도 그의 목숨을 구했다. 어린 새매의 발톱은 낡은 지푸라기들만을 한가득 부둥켜안았을 뿐이다. 길 위에는 이 모든 숨 막히는 삶의 장면들이 생생히 펼쳐져 있었다. 경탄하고 또 경탄하며 걸었다.

하늘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모든 세상과 시간이 하늘을 향해 피고 지었다. 하루가 태어나고 마지막 광채로 스러지는 곳은 하늘이었다. 그 하루의 생과 죽음의 모여 삶이 되었다. 최후의 안식처이자 삶의 목적지인 그곳을 향해 모든 인간들이 다 서고 있었다. 천변만화(千變萬華)하는 그곳에서 모든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닿을 수 없는 영원한 노스탤지어로 마음을 간지럽혔다.

하늘에 그리움을 담자 세상이 온통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석양 속에서, 노래하는 사과꽃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하늘에 새겼다. 잠시나마 같이 있는 것만 같았다.

선연이가 그리웠다. 그 애달픈 그리움은 순식간에 마음을 온통 채웠다. 이 아이에 대한 나의 마음은 하늘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처럼 닿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였다. 선연이는 하늘을 닮아있었다. 천 번 변화하고 만송이의 꽃이 만개하는 하늘이 온통 다 아름답듯, 선연이도 그렇게 사랑스러웠다. 침묵의 밤하늘과, 부서지는 노을과, 쾌활한 아침과, 외롭고 공활한 가을 하늘과 소용돌이치는 여름의 창공, 먹먹한 겨울 하늘이 온통 다 그렇듯 선연이도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하나하나씩 하늘에 그렸다. 그 서글서글하고 보드라운 미소도, 봄 비 같은 웃음도, 고민할 때의 멍한 표정과 깜짝 놀랐을 때의 동그란 이슬 같은 표정도 다 하나하나씩 섬세하게 하늘 위에 그렸다. 하늘이 온통 선연이가 되고 선연이가 하늘이 되었다. 그 순간, 그 하늘을 사랑한다는 것을 새삼 선명하게 깨닫고 말았다.

선연이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 보았다. 그 소리가 세상을 향해 퍼지는 것이 참 좋았다. 한 번 더 조용히 불러보았다. 그리움이 종소리처럼 더 크게 석양을 타고 메아리치며 퍼져나갔다. 묵주 팔찌가 그 마법 같은 색채 속에서 가만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석양의 황금빛 광채 속에서 은정이에 대한 생각도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은정이의 웃음은 그 찬란한 햇빛을 닮아 있었다. 그것은 은정이를 처음 만난 날부터 느꼈고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선명한 느낌이었다. 그 아이가 웃을 때면 세상은 밝아졌고 두려움은 움찔거리며 도망치곤 했다. 세상을 마법 같은 광채로 뒤덮은 석양은 그 웃음 그 자체였다.

은정이는 그 도톰한 앵두빛 입술로 내 이름을 줄곧 불러대곤 했다. 그 목소리엔 졸리면서도 영롱한 의미들이 담겨있었다. 문득 그 목소리가 그리워지고 말았다. 늘 어두웠던 내 마음을 밝아지게 해 주던 몇 안 되던 사람인 이 밝고 예쁜 소녀는 내가 사라진다면 영문도 모른 채 그 크고 영롱한 눈으로 눈물을 흘릴 게 분명했다. 그 사실에 못내 마음이 아파서 돌아갈 수 없을지도 생각하던 마음이 멈칫거렸다.

나 하나쯤, 이 세상에서 그리 큰 공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석양의 마지막 햇살 같은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도 모두들 마침내는 그 부재에 익숙해진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 풍경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상하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라는 작은 형태를 쏙 도려냈을 뿐인 세상인데, 그 안에는 아픔의 조각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 조각들을 치우면 세상은 참 괜찮은 곳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많이 아팠다. 세상 속에서 작은 공간을 차지하며 사는 것도, 그 공간을 비우고 그 여백을 더듬는 것도 말이다.

성희는...... 성희는...... 나는 성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성희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하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짙은 두려움이 밀려들어와 나를 채웠다. 내 몸보다도 큰 마음속의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온 그 어둠은 죄책감으로 세상의 모든 색채를 앗아갔다. 나는 성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석양을 향해서 계속 다가서는 그 길에서 나는 두 명의 여학생들을 마주쳤다. 여고생으로 보이는 그 아이들은 사과꽃 향기 흩날리는 그 길에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버스도 자동차도 트럭도 시간도 그 둘을 말없이 지나쳤다. 세상에 대해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둘은 재잘재잘 서로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문득, 그 두 소녀의 모습 위로 남학생 한 명과 여학생 한 명의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그 두 남녀도 석양을 향해서 걷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여학생은 곱게 접은 나비 같은 편지를 남학생에게 건네어 주었다. 그 편지 안에는 세상의 벽을 허무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꾸만 세상이 멈추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뚝 멈추어 있어도 세상은 자꾸만 나를 앞으로 밀어냈다. 머뭇거리는 손을 내밀어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오롯하니 나만을 위한 편지였다. 그렇게 함께 걷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함께 걷던 그 길 위에는 이제 나 홀로 남아서 외로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햇살 담긴 바람이 불어와 두 여학생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함께 걷던 남학생과 여학생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바람이 그들의 모습을 흩어 하늘을 향해 날렸다. 별모래처럼 아른거리며 사라지는 그들의 조각을 보며, 마침내 나지막이 성희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성희야.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석양이 점차 사라지며 막막한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리움도 죄책감도 다 내 안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아픔은 끊임없이 나를 두드렸고 그것은 대장장이의 망치질처럼 내가 온통 내가 될 수 있도록 나를 빚어내었다. 그 두드림과 담금질 속에서 점점 생각과 상념이 비어 가고 있었다. 그 텅 비어 가는 느낌 사이에서 어렴풋하게 나 자신을 느끼고 세상을 더듬었다. 낮이 바뀌고 밤이 지났다. 벌판과 산이, 도시와 강이 흐르는 풍경이 되어 지나갔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둔탁한 호흡과 동동거리는 심장, 땅과 발이 부딪히는 울림만이 삼박자가 되어 어우러지며 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순간 비로소 나 자신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온통 흘러가고 변하는 세상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더듬고 다듬는 것은 변하지 않는 나 자신이었다. 세상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진대도, 나를 사랑하는 이가 떠나간대도 나는 그대로 나였다. 내 사랑도 내 죄도 결국 나였고 그것은 도망친대도 놓아버리려고 한대도 그 자리에 눌어붙어 나를 언제까지고 이루고 있었다. 문득, 이 긴 여정의 끝에도 용서는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나를 알았지만 내 사과를 받아줄 그 아이는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긴 발걸음들이 비로소 멎고 말았다.




1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