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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배추 Mar 04. 2024

추억이 많은 맨하탄의 거버넌스아일랜드

여름에는 바베큐를, 가을에는 자전거를, 겨울에는 자원봉사를 했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왔다가 가는 것처럼 글이 자연스럽게 쓰인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날이 대부분이다. 달력을 보지 않았더라면 깜빡 속았을지 모르는 요즘의 날씨. 그래도 군데군데 초록색 식물들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자니, 봄은 성큼 다가온 듯하고, 곧 여름일 것 같다.


맨하탄의 날씨도 한국의 날씨와 참으로 비슷해서 추운 겨울이 지나면 은근 서늘한 봄이 오고, 봄이 왔다 싶으면 본격적으로 햇볕이 쨍쨍한 여름이 된다. 한낮의 여름은 맹렬하게 내리쬐는 땡볕과 더위 아래에서 내 몸은 곧 불타오를 것만 같지만, 여름이라서 즐길 수 있는 일들은 언제나 있다. 나의 경우에는 Governors Island( 거버넌스 아일랜드)인데, 갈 때마다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서 그곳이 바로 행복한 장소이다.


그 이유에는 바베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맨하탄 내에서 바베큐를 ‘공짜로’ 할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다. 아파트에 바베큐시설이 있는 경우에는 대여가 가능하지만, 공짜는 아니다. 당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우에는 자그마치 1시간에 150달러의 비용이 필요했는데,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심지어 하루종일 빌리는 것도 아니고, 단 한 시간이라니. 렌트했다고 한들, 정해진 시간에 시간제한 내돈내산 뷔페느낌으로 직접 구워 먹을 생각을 하니 이미 체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거버넌스아일랜드에서는 30달러 미만으로 그릴을 빌릴 수 있는 데다가, 운영시간 내에는 편안하게 수다를 떨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실제로 예약 후에 지정 장소로 가면 바베큐그릴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약간은 황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행히 관리하는 곳에 연락을 하면, ‘뛰뛰’를 타고 와서 자물쇠를 풀어준다. 외부에서 사 온 숯불을 넣고, 고기를 구우면 바로 여기가 우리 집 뒷마당이 된다. 솔직히 모든 걸 준비해 와야 한다는 점은 번거롭지만,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돌 수도 있고, 연도 날릴 수도 있으니 딱 좋다. 특히 여름에는 카약렌트도 가능하고, 주말에는 더 이상 쓰지 않는 전자제품이나 가구들을 모아놓은 ‘폐품놀이터’가 운영된다.

가을에는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았는데, 강이 보이는 곳을 여유 있게 돌다 보면 마음에 여유가 찾아든다. 번잡하지만 시티바이크도 있고, 비싸지만 자전거대여소도 있다. 자전거를 맨하탄에서부터 들고 들어가도 되긴 하는데, 페리를 타고 내릴 때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불편하긴 하다. 자본주의 미국에서는 돈을 쓰는 쪽이 편한데, 돈을 쓰는 마음도 불편하니 문제다.


사실 나에게는 이것 말고도 특별한 추억이 한 가지 더 있다. 여름의 바베큐와는 상반되는 추운 겨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잊어버린 건 아닌가 착각이 될 정도로 고요한 거버넌스아일랜드. 관광객들은 없지만 이맘때 정원사들은 매우 바쁘다. 봄부터 가을까지 아름다운 정원과 풀밭을 선보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정원사분들은 자원봉사를 모집하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그날은 폭풍이 불어닥친 날이었다. 다행히 페리는 취소되지 않아 무사히 출발하였고, 탑승한 사람은 총 3명이었다. 직원이 승객보다 많은 상황. 그나마 나머지 두 명도 학교 때문에 가는 듯 보였다. 겨울에는 이 정도로 사람이 없다.


얼어있는 비료를 주워 담아, 정원의 흙 위에 이불처럼 뿌리고 덮어주며, 잡초들을 솎아내다 보면 땀이 뻘뻘 난다. 어느새 내 손에도 비료가 묻어 퀴퀴한 냄새가 나지만, 추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니 겨울인지 여름인지 알 수가 없다.


노동이 머릿속을 맑게 해 주어 몸이 고될수록 머리는 투명해졌다. 빨리 저 흙들을 다 엎어서 봄의 꽃이 예쁘게 자라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서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비행을 저질러서 강제봉사로 온 청년이 나를 도와주었고, 우리는 예상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빠르게 일을 마쳤다. 작업도구를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고 서로에게 인사를 마친 후 우리는 비료냄새가 섞인 몸으로 다같이 페리에 동승했다. 낯가림과 영어공포증이 심한 나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었지만, 페리에서 헤어질 때는 동방예의지국사람답게 허리를 굽여 인사도 했다.


결국 난 봄의 정원을 보지 못하고 왔지만, 지금처럼 추운 겨울과 봄사이에는 항상 거버넌스가 생각난다. 분명 여름이 되어도 생각날 것이다. 이렇게 추억이란 건 장소에 벗어나도 졸졸 따라다니는 건가 보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지금도 추억을 잔뜩 만들어야겠단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다만 이게 강박증이 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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