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땅이 키운 달콤한 뿌리, 영암 황토 고구마

by 길가영
영암 황토고구마_05.25.jpg 영암 황토고구마



겨울이면 생각나는 따뜻한 간식이 있다. 바로 고구마다. 지금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흔한 간식이지만, 내가 어릴 적 고구마는 ‘겨울의 별미’이자, 가슴 따뜻해지는 음식이었다.


기억 속의 겨울 저녁, 동네 어귀에 군고구마통이 나타나면 그 연기 냄새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췄다. 검은 드럼통 안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던 고구마는 손에 쥐는 순간부터 온기가 전해졌고, 막 껍질을 벗겨 한 입 베어 물면 속살이 꿀처럼 달고 촉촉했다. 그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고구마 하나를 그냥 먹지 않았다. 김장 김치가 잘 익었을 때쯤이면, 김치와 고구마를 함께 먹는 게 별미였다.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얼마나 오묘했던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그 조합이 입맛 없는 겨울철 최고의 반찬이자 간식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고구마의 추억은 바로 ‘고구맛탕’이다. 지금처럼 외식이 흔하지 않던 시절, 중국집에서 고구맛탕이 메뉴에 있는 집은 어쩐지 고급스러워 보였고, 우리는 그 반짝이는 황금색의 고구마 조각을 대단한 요리처럼 대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건 진짜 특별한 음식이구나’ 싶었다.


그때는 몰랐다. 고구마가 그렇게 특별했던 이유가 단지 맛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겨울의 추위를 녹여주던 고마운 온기였고, 식구들과 함께 나눠 먹던 따뜻한 마음이었으며, 군고구마통 위에서 피어오르던 연기와 함께한 한 시대의 기억이었다.


그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고구마를, 지금도 정성스럽게 기르는 땅이 있다. 바로 황토에서 자라 깊은 단맛을 품은 고구마의 고장, 영암군이다.


전라남도 영암군은 붉은 황토가 너른 들판에 펼쳐진 땅이다. 황토 고구마는 붉은 황토와 월출산의 정기가 어우러져 탄생한 대표 특산물이다.


이 땅에서 자란 고구마는 평범한 뿌리식물이 아니다. 단맛과 식감, 그리고 땅의 기운까지 고스란히 담은 고구마는, 오늘날 ‘영암 황토 고구마’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영암의 황토는 규산, 철, 칼륨 성분이 풍부하여 보온성과 배수성이 뛰어나며, 뿌리작물의 재배에 적합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암 삼호읍, 신북면, 시종면 등지는 황토층이 깊고 질이 곱기로 유명하며, 예로부터 ‘고구마 한 뿌리에도 향이 배어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영암 황토 고구마는 재배 초기에 적절한 일조량과 강수량을 받아 전분 함량이 높고, 수확기에는 기온차가 커서 당도가 절정에 달한다.


고구마는 원산지가 중남미인 아열대 작물로, 16세기 콜럼버스의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거쳐 중국, 유구(오늘날의 오키나와), 일본 대마도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조선에 고구마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1763년(영조 39년)으로,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 그 종자를 부산으로 보낸 것이 계기였다. 조엄은 고구마를 부산에 심어 재배에 성공한 후, 이것이 점차 남부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전라남도 지역은 온화한 기후와 배수가 잘 되는 토질 조건으로 인해 고구마 재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대마도에서 고구마는 ‘효자마(孝子麻)’ 또는 ‘고 귀위마(古貴爲麻)’로 불렸는데, 이 발음이 변형되어 오늘날의 ‘고구마’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영암 지역 역시 월출산 자락의 비옥한 토양과 해안 평야의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고구마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삼호면과 덕진면 일대의 황토 지대는 배수가 잘 되고 유기물 함량이 높아 고구마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해방 후 1970년대부터 영암 지역의 고구마 재배는 본격적인 상품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농업 기술의 발달과 함께 재배 면적이 확대되었고, 품종 개량을 통해 품질 향상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는 전국에 ‘영암 황토 고구마’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농가에서는 자급자족을 넘어 시장 출하를 목표로 품질 향상에 힘썼고, 영암군 농업기술센터는 황토밭의 특성을 살려 당도 높은 품종을 도입하고 재배법을 체계화하였다.


현재 영암 황토 고구마는 연간 약 2만 톤이 생산되며, 당도가 높고 식감이 우수하여 전국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단순한 생고구마 판매를 넘어 군고구마, 고구마 말랭이, 고구마 빵 등 다양한 가공품으로 개발되어 6차 산업의 모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제는 지역축제와 연계해 관광상품으로도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는 영암군에서 연간 수천 톤의 황토 고구마가 생산되며, 일부는 농산물우수관리(GAP)와 친환경 인증을 받아 고급화 브랜드로 정착하였다.


오늘날 영암 황토 고구마는 전통적인 재배 방식과 현대적인 가공 기술이 조화를 이룬 성공적인 농업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지역 농민들이 수 세대에 걸쳐 축적해 온 재배 노하우와 황토라는 천혜의 자연조건, 그리고 체계적인 브랜드 관리가 결합되어 현재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영암 황토 고구마의 성공은 단순히 하나의 농산물이 잘 팔린다는 의미를 넘어서, 지역의 자연환경과 농업 전통이 현대적 마케팅과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남도 농업문화의 지속가능한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 『전라남도의 향토음식』, 전라남도청 문화관광과, 2015

영암군청, 영암 특산물 소개 페이지 https://www.yeongam.go.kr

농촌진흥청, 『고구마 품종별 생육 및 당도 연구자료』, 2010

전라남도 농업기술원, 『전남 농업의 어제와 오늘』, 2010

영암군농업기술센터, 『고구마 재배지도 보고서』, 2016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영암 고구마』, www.grandculture.net

경인일보 https://blog.naver.com/kyeongin1945/223717929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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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history.go.kr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10_0030_0020_0020&whereSt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제33권 조선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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