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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 강진의 차 문화 이야기

by 길가영
강진 차문화_10.19.png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


강진의 차 문화는 단순히 남도의 명산에서 자란 찻잎의 향기를 넘어, 조선의 사상과 정신문화가 녹아든 깊은 인문학의 산물이다. 그 중심에는 유배지 강진에서 차를 통해 마음을 닦고 세상을 성찰했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그 제자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있다.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강진의 차 문화는 바로 이 시기부터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는 유배 중에 차를 단순한 음료가 아닌 ‘도(道)를 깨닫는 매개’로 삼았으며, 제자들과 함께 차를 나누며 인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다산은 “차를 마시며 허공과 내 마음을 함께 맑히노라”는 시를 남겼는데, 이는 차를 통한 수양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진 다산초당 근처에는 다산이 직접 가꾼 작은 차밭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차를 덖으며 강진의 맑은 물로 우려낸 차는 그에게 학문의 벗이자 정신의 안식처였다.


이 차 생활을 계기로 결성된 모임이 바로 ‘다신계(茶信契)’이다. 다신계는 다산과 제자들이 차를 통해 인격을 닦고 학문을 나누기 위해 맺은 일종의 다회(茶會)로,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상징적인 조직이다. 이 모임을 통해 차는 학문과 도의 매개가 되었고, 유배지였던 강진은 오히려 조선 차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다산의 제자 중에서도 초의선사는 차문화를 철학으로 승화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출가하였으며, 강진의 다산을 여러 차례 찾아뵙고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았다. 다산은 초의선사에게 차를 매개로 한 학문적 사유와 인간적 교류를 전했고, 초의는 이를 불교의 선(禪) 사상과 결합시켜 ‘다선일미(茶禪一味)’, 즉 “차와 수행은 하나의 깨달음으로 통한다”는 정신을 세웠다.


초의선사는 이후 강진과 해남 일대를 중심으로 차 문화를 발전시키며, 제자들과 함께 차밭을 가꾸고 제다법을 정리하였다. 그는『동다송(東茶頌)』을 남겨 차의 품격과 제다의 철학을 시문으로 풀어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세속의 때를 씻는 일이며, 마음을 비우는 공부”라 한 그의 구절은, 강진 차 문화가 단순한 향토산업이 아니라 정신 수양의 도구로 기능했음을 말해준다.


초의선사와 다산의 교류는 훗날 이한영으로 이어졌다. 이한영은 다산의 제자 이시헌의 후손으로, 다산-초의선사-이시헌으로 이어지는 차 문화의 계보를 계승하였다. 이한영은 강진 성전면 월하리에서 백운옥판차를 생산하며, 조선 후기의 전통 제다법을 근대 산업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다산과 초의의 정신을 이어받아 “차는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는 철학을 실천했다.


이처럼 다산에서 초의로, 초의에서 이한영으로 이어지는 강진의 차맥(茶脈)은 단절되지 않고 시대마다 새로운 형태로 계승되었다. 다산이 차를 통해 학문과 도덕을 닦았다면, 초의는 이를 수행과 예술로 승화시켰고, 이한영은 그 전통을 산업과 브랜드로 확장하였다.


강진의 차 문화는 남도의 풍토와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 낸 조화의 결정체이다. 강진의 산과 물이 차의 향을 빚었고, 다산의 사유가 그 맛을 깊게 하였으며, 초의의 수행이 그 정신을 완성하였다. 오늘날 강진의 녹차밭과 다산초당, 초의선사의 발자취는 모두 그들의 차 철학이 남긴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정약용 저, 1830년대 초.

『다신계 약조문(茶信契約條文)』, 1809년, 강진 다산초당 자료.

초의선사, 『동다송(東茶頌)』, 1830년경.

해남 대흥사 사적기, 19세기 중엽.

강진군청 문화관광과, 「다산과 초의의 차문화 관련 복원 사업 보고서」, 2020.

김의정, 「조선후기 다산과 초의의 차문화 교류 연구」, 『남도문화연구논총』,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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