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녹차는 조선의 공식 기록 속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차 산지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차의 전통은 문헌과 유적을 통해 지금까지도 확인된다.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역사 속에 근거를 둔 강진의 차밭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권의 기록 문화유산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46)에는 “강진현에서 작설차를 공물로 바친다(以雀舌茶貢)”는 구절이 있다. 작설차는 봄철 어린 찻잎을 일찍 채취해 만든 고급차로, 조선 왕실과 관리층이 즐겨 마시던 품목이었다. 강진이 공물 목록에 오른 것은 이미 15세기 중엽에 차 재배가 체계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신 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백련사와 백운동에서 차를 달여 올린다(於白蓮寺及白雲洞煮茶以進)”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강진 차밭의 중심이 사찰 문화와 맞닿아 있었음을 의미한다.
백련사는 고려 후기 요새가 결성한 백련결사(白蓮結社)의 중심지로, 수행과 함께 차를 마시는 전통이 깊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불교 의례와 수행의 매개가 되었다.
18세기 이후에는 문인들의 기록에서도 강진의 차가 자주 언급된다.『대동지지』와『여지도서』에는 강진의 주요 산물로 차가 명시되어 있으며, 이 시기부터 차는 불교 영역을 넘어 민간으로 확대되었다.
장시(場市) 문서에는 “강진산 작설차와 흑차가 전라도 여러 고을로 운송되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는 강진 차가 지역 교역의 중요한 상품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문헌 속 강진의 차밭은 오늘날에도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백련사 뒤편의 야생 차밭은 200년 이상 된 차나무 군락으로,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차재배의 현장이다.
월출산 남쪽 자락 성전면 월하리 일대 역시 차 재배의 중심지로, 현재는 ‘백운옥판차’ 복원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의 화강암질 토양과 온화한 해풍은 차의 떫은맛을 줄이고 향을 깊게 만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특히 백운동원림은 조선 후기 별서정원의 전형으로, 정자·연못·차밭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곳은 사대부 문인들이 차를 달이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문화의 장이었다. 정원 내 ‘청풍각’과 ‘취미로’ 같은 누정 이름은 당대 문인들이 자연과 차를 매개로 교유하던 흔적을 보여준다.
현대의 강진군은 이러한 유적과 기록을 바탕으로 전통 차문화를 복원하고 있다. 백련사 다도 체험, 월출산 차문화길, 백운옥판차 복원사업은 모두 조선의 기록을 현실로 되살리는 시도다. 과거 문헌에 적힌 강진의 차밭은 이제 문화유산과 산업의 형태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조선의 기록 속 강진 차밭은 단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남도의 문화 정체성을 증명하는 텍스트다. 문헌이 증언하고, 유적이 이를 이어주며, 사람들의 손끝이 그 맥을 잇는다. 천년의 향기는 기록에서 시작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잎새처럼 살아 숨 쉬고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세종 28년(1446), 강진현 작설차 기록.
『신 증동국여지승람』, 중종 25년(1530), 백련사 및 백운동 다업 기록.
『대동지지』, 김정호 저, 1861.
『여지도서』, 18세기 후반, 전라도 강진현 편.
문화재청, 「백운동원림 국가명승 지정 해설자료」, 2019.
강진군청 농업기술센터, 「백운옥판차 복원사업 보고서」, 2021.
박희성, 「조선후기 강진의 사찰과 차문화 관계 연구」, 『호남문화논총』, 2018.